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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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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일용할 양식
일시: 2021년 9월 19일
본문: 마태복음 6: 5-8, 11 출16: 4, 12
찬송:  새(2)찬양성부성자성령, 새(28)복의 근원강림하사, 새(393)오 신실하신주
교독문: 121(새)

들어가며
기독교인들에게 주기도문은 일찍이 익숙하게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뜻을 설명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 적부터 스스로 그 뜻을 새겨보기도 전에 예배가운데 주기도문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익숙한 구절이 낯설게 다가오듯이 스스로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다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언덕에서의 가르침 후에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 예수님은 한가지 주제와 관련한 3가지 중 기도를 가르치시며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옳은 것을 대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대교에서 시간 맞춰서 하느랴고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기도자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를 좋아 했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빈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는 너희가 필요한 것을 안다 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반교회에서 금요기도회나 새벽기도에서 큰소리로 장시간 기도를 하게 하는 모습에 다시 생각하게 하며, 그 열심(?)인 기도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마이크를 키고 기도를 하는 모습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기도회를 진행하는 진행용 기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이라고 하는 인간의 노력을 믿는 게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를 믿는다면 어떻게 기도할 것이냐고 우리에게 물음을 던져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바깥으로 보이려는 자와 다른 모습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 그러니까 그런 필요를 잘 모르는 인간된 아버지, 인간된 부모와는 다른 분이라는 걸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쉽사리 이해하거나 헤아리기 어려운 인간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 앞에서 아버지라 가까이 부르면서 무어라고 기도할 것인지,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구하는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기도할 때는 언제든지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중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짧게, 더 길게 ‘일용할 양식’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외의 부분은 주기도문을 주제로 설교하신 많은 분들의 설교문으로 넘기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쓰는 편지인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하늘에 위엄을 실어 아버지를 부릅니다. 우리를 아시는 분, 그 분을 발음조차 삼가는 게 아니라 단순하고 가깝게 아버지(Abba! 아람어)로 말을 걸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쓰는 친숙한 새 용어를 제자들과도 공유합니다. 그 대상을 확실히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1회만 사용된 말(에피우시온 헬라어)입니다.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로 말의 의미를 찾는 고대어로서는 풀기가 어려워지는 지점입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십시오’ 하는 표현으로 일반화 시켜줍니다. 마태복음의 “오늘”이라는 말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떡)’, ‘오늘을 살기 위한 (떡)’, 주기도문이 아침 혹은 저녁에 드려지는 시점에서 ‘다가올 날을 위한 (떡)’으로 의미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의미를 ‘매일 필요한’으로  ‘우리가 필요한 (떡)’이라는 의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필요한 양만큼 모을 수 있었던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광야에서 배고픔에 주린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광야에서 우리를 주리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자신 앞에 펼쳐진 자유를 살아내기보다는, 앞으로 되어 질 것을 소망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기억합니다.  이 불평에 대한 해결책은 불평을 무시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양식을 줍니다. 광야의 궁핍함에서 나오는 불평을 들은 하나님은 그 때에 행동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지라(4)’고 하십니다.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를 것이라(12)’고 하십니다.

메추라기는 아프리카에서 날아오거나 지중해에서 몰려오는 많은 새를 대변하는데 사람 손에 잡힐 정도라고 합니다. 오랜 여정으로 지친 메추라기들이 시내 반도 지역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고수풀처럼 작고 얇은 씨여서 따기 쉽다고 합니다. 하얀색이여서 눈에 잘 띄고 이슬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정결하고 먹기에 안전하다고 할 수 있으며 꿀 섞은 과자 맛이 났다고 합니다. 만나에 대해 일종의 진딧물 같은 벌레가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의 열매에 구멍을 내어 그 열매의 즙에서 나오는 누르스름하면서도 하얀 조각이나 알갱이를 가리킵니다. 이는 탄수화물이나 당분이 풍부하여 원주민들은 오늘날에도 모아서 빵으로 구워서 먹는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이것이 무엇이냐”뜻의 [만후]라고 말했기에 오늘날 만나라고 칭하는 것은 이에서 비롯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오기 전에도 있었고, 그들이 떠난 후에도 있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자연적인 현상이면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만나와 메추라기기 자연계에 속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연계에 속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일상적인 것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하신 양식이 특별하거나 기적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주어졌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로부터 하나님을 배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적적이고 특별한 것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식을 주는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며(12)  양식에 매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양식제공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데 있다 합니다. 백성들이 구할 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양식을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합니다.  백성들은 매일의 양식을 통하여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확실하게 모든 일상적인 복이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시험
선물로 양식이 주어지는데 그 선물에 대한 책임감을 어떻게 이행하느냐가 주목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내 말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시험해본다는 말이 덧붙여집니다. 시험하는 것은 알아보시려는 것인데 인간의 선택이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하기 때문 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신8: 2-3)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생명과 복을 우선하시지만 백성들이 자신의 뜻에 귀를 기울일 것일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아십니다. 시험을 통해서 백성들이 하는 반응의 의미를 아셔야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일정량의 식량을 거두게 하였고 ‘아침까지 그것(식량)을 남겨두지 말라(19)’는 명령합니다. 식량을 먹든지, 나누던지, 버리든지 소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분의 양식을 챙길 것과 그리고 내일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내일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요이 한날의 괴로움을 그 날로 족하다고 하십니다(마6: 31,34). 오늘 하루라는 일상을 훈련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더 많이 챙겨서 다음날 아침 못먹게 된 식량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쉼을 위해서 육 일째는 두 배를 거두고 다음날은 장막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지만 사람들은 쉼의 날에도 장막 밖에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당장 오늘 하루 먹을 것만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입니다. 현대에 나의 일이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고, 월요일의 하루는 하루치로 마쳐지지 않고 모든 날로 번져갈 수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입니다.

하나님편에서 이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로 백성들과 맺는 관계를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고 크신 섭리를 펼쳐나가기 위함입니다.


나가며
하나님은 필요한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가는 이에게 쉼을 주십니다. 그 쉼은 일상의 필요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걱정하면서 멈추지 못하고, 분에 넘치도록 더하기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할 필요를 자극합니다. 매일의 양식에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함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사정을 아뢰는 이들은  성령으로 감화되어 오늘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주의 기도를 하며 양식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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