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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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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나/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본문 시편 42: 1; 로마서 8: 5/찬송 53, 493, 505/교독 42 (마태복음 5장)


1. 호수 풍경:

몇 달이 되었습니다. 일산 호수 공원 둘레 길에 색다른 현수막/걸림막이 이쪽저쪽 곳곳에 내걸려 있습니다. 코로나 돌림병 예방에 도움이 되게, 산책 할 때 ‘한 방향으로 걷자’며 공원관리부서에서 걸어놓았습니다. 걸림막에는 한 방향으로 가자는 글도 있고, 색채를 넣어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돌림병 이전처럼 두 방향으로 걸으면, 마주 오는 사람들과 2M 거리를 유지하기도 어렵고 접촉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제안이자 권고였습니다. 한 방향으로 걸으면 일정 거리를 지키기가 쉬워져, 안전을 꾀할 수 있을뿐더러 답답한 마스크를 계속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한 방향 걷기’ 표시를 짐짓 모르는 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시치미를 떼고는 역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스크조차 제대로 쓰지 않고는 어떤 켕김도 없이 늠름하게 걷습니다. 그 품이 몹시 의기양양합니다. 마구 역방향으로 걸어오는 저 건장한 어른들의 당당함과 뻔뻔함의 기색은 하늘을 찌르는 듯도 합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순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다가가겠다는 듯이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것일까? 제 마음속에 생겨난 물음입니다.

‘왜 거꾸로 걸으시는 겁니까?’ 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자 했으나 아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침 걸림막을 지나는 몇몇 초등학생들에게 다가가 물어보기는 했습니다. 바로 앞 걸림막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어째서 저쪽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한 늙은이의 이 물음이 전혀 엉뚱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는 피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여 지키면 좋을 것 같은 걸림막의 메시지에 대해서 어떤 느낌도 갖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마음속 물음입니다.

이러한 때 제 설교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좁은 삶이 아니라 그 너머 더 넓고 더 높은 삶에 잇대어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다가갔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똘똘하고 야무지다고 해도, 아무리 꾀가 많고 약빠르다고 해도, 아무리 능력과 지식 덩어리가 크다고 해도, 아니 아무리 자기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모두를 질문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웃에 대한 존중의 마음 같은 것은 아예 접어두고 자기 본위로 사는 삶과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말씀으로 다가갔습니다.


2. 두 가지 바탕:

그렇게 해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은 본문 앞에 제가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훤히 알려진 성경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 또한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신약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는 이를 ‘육신’에 맞대어 풀이합니다. ‘육신’과 ‘영’, ‘영’과 ‘육신’, 이 둘을 대비시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이라는 낱말은 우리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살과 피와 뼈를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몸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몸을 위해서 어쩌지 못하고 먹고 마셔야 하는 몸의 욕구나 몸의 본능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닌 ‘영’과 구별되는 뜻으로서의 ‘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이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린도전 5: 3ㄱ)고 한 그의 편지에 나오는 그러한 ‘몸’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베소 1: 23ㄱ)이라고 상징으로 표현한 그 ‘몸’도 아닙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 1ㄴ)고 할 때 우리가 바쳐야할 ‘우리의 모든 것’, ‘사람의 모든 것’을 뜻하는 그 ‘몸’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육신’이라는 낱말은 타락한 인간성, 썩어 더럽혀져 자기 본위로 마구 날뛰는 인간 본성-“죄의 본성”(8: 6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뜻을 분명히 하고자 하여 바울은 이 ‘육신’과 ‘영’을 서로 맞대어 그 차이를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 ‘영’은 무엇입니까? ‘영’은 위에 말한 ‘육신’과 맞섭니다. ‘영’은 ‘타락한 인간성, 썩어 더럽혀져 자기 본위로 날뛰는 인간 본성’과는 다릅니다. 이 ‘영’은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본성이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육신’의 반대가 ‘영’이고, ‘영’의 반대가 ‘육신’입니다. 그리하여 ‘육신’과 ‘영’은 엇갈리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3. 믿는 자의 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을 따라 ‘육신’이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합니다. ‘육신’의 뜻을 따라 삽니다. 다른 말로, 이들 믿지 않는 사람은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타락한 인간성’을 따릅니다. 그 인간성이 원하고 바라는 바에 마음을 두고 움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지배-‘죄의 본성’의 지배’(8: 8ㄱ)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구별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을 따라 ’영‘이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합니다. ’영‘의 뜻에 따라 삽니다. 다른 말로, 이들 믿는 사람은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타락한 인간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인간성이 원하고 바라는 바에 마음 두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영’의 지배-“성령의 지배”(8: 6ㄴ, 9ㄴ) 밑에 있습니다.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릅니다.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어떤 데 시간을 바치고 관심을 쏟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생각을 하는지, 어떤 까닭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행동하는지,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사는지를 살펴보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구별되고 구별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서 선택을 입었습니다. 뽑혔습니다.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타락한 인간성’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본성을 되찾고 되살려 그에 따라 사는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믿음의 사람은 ‘새 사람’(에베소 4: 24)으로 새롭게 지음 받아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고후 5: 17)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믿음의 사람은,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타락한 인간성’에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라 삽니다. 이런 까닭에 믿음의 사람은 깊은 내면의 긴장과 갈등을 피하지 못합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영’을 따라 살 것인지, 이 두 삶의 길에서 긴장하고 갈등합니다. 우리는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내 안과 내 밖의 ‘타락한 인간성’이 내리누르는 압력과 그것이 꾀어내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믿음의 사람은 ‘육신’의 뜻을 따라 ‘인간 자신’을 즐겁게 하는 삶의 지향성에 맞서 ‘영’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지향성으로 나아갑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고 하는 시편의 구절처럼, 믿음의 사람은 ‘영’을 갈급해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삶: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의 삶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언제나 자신의 생각, 행동, 삶을 깊이 헤아리고 살핍니다.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를 본위로 하여 날뛰는’ ‘타락한 인간성’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는 하지만,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음의 햇수가 길다고는 하지만, 실은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 위주로 움직이는 ‘타락한 인간성’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호되게 몰아쳐 묻고 끊임없이 물으며 자기 자신을 문제시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요즘 말로 ‘자기-비판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자기-비판 능력’을 지닌 교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처럼 부동산에 대한 소유욕과 부동산을 통한 재산증식의 욕구에 이토록 에너지를 빼앗기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 시장’의 원리라 어쩔 도리가 없다며 굳세게 믿어온 우리의 습속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여기고 미화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최상의 경제 체제라고 절대화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육신’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뜻을 따르기만 하는 타락된 인간의 고안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 집을 찾지 못하여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의 힘듦과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소유욕과 거기에 터한 체제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신성불가침의 항목으로 굳히려는 이 사나운 탐욕의 기관차야말로, 이웃을 돌보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썩어 이미 더럽혀진 ‘자기’ 위주로 움직이는 ‘타락한 인간성’의 감옥에 갇힌 자들이 그 감옥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탐욕의 쇠사슬을 풀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가당찮게도 ‘자유’를 외치는 저 기득권자들의 거센 신소리는, 하나님의 본성이 다스리는 ‘영’의 세계 저 편 ‘육신’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따라 ‘이웃’을 귀히 여깁니다. 이것은 ‘영’을 따르는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영’에 비추어 자신을 ‘비판’하고 이 시대를 ‘비판’합니다.


5. 맺으며:

호수 공원 둘레 길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됨됨이를 한 마디로 평가할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사유재산권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부동산 소유주들을 정죄할 위치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다. ‘육신’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지, ‘영’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지, 다그쳐 물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피하지 못하고 마주하게 되는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줌으로 예배드립니다. 범세계 돌림병 사태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 은총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범세계 돌림병 때문에 ‘범세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범세계 돌림병 한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영’을 따르는 것인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말씀을 새기며 살아가도록 예람 모두를 지켜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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