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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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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순

제목


버리고 따르는 예수사람
창세기 11:27-12:5, 마태복음 4:17-22
교독문 : 41.  이사야 65 장
찬송가 565장 예수께로 가면.29장 성도여 다함께.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예수사람

  '예람'은 예수사람을 줄인 말이죠. 그런데 예수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오늘날은 전에 없던 돌림병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고, 기후변화 위기만이 아니라 혼란스러울만큼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과연 예수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심각하게 묻고 구해야할 주제겠지요, 오늘은 이 두 본문을 통해 예수사람의 본을 찾아보고 그 물음을 같이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함께 읽으신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야기고요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이 하란 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신 후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따라 살던 땅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두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커다른 방향전환, 버리고 떠나서 하나님을 따르다

  제자들은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와 가문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인간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이들이며 그 후예들이지요.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은 무법천지를 만들어 하나님이 그들을 다 싹 쓸어버리시는 노아 방주 이야기도 대부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그 후손들에게, 인간들에게 다시 축복을 내린다는 약속을 하세요.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거든요. 자식을 낳지 못했던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만큼 하늘의 별만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인류는 그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는 것이지요. 하란에서 떠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고, 전과는 아주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개인에게도 삶의 커다른 전환이었지만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고 쫓겨나 죄를 일삼던 인류에게 커다라 방향전환이자 축복이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들로 변모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증언이 복음서 기록으로도 이어지고 지금 저희가 보는 성경으로까지 남게 되며 그들 중 상당수는 순교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니 제자들이 자기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 역시 인류에게 커다란 방향전환이자 축복인 셈입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을 따랐고 정든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거나 생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린 후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이지요. 그들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자기 소망과 애착을 버렸고, 평생 살면서 익숙해진 것을 버렸고, 자기가 생각하던 안전한 삶을 더 이상 안전하다 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단절이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들이 결단하며 뒤바뀐 생의 대전환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기

  마태복음 4:17절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회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광야에서 마귀를 물리친 후 예수님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고 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부른 이야기가 이어지거든요. 그러니까 회개란 예수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고 내가 내 힘으로 내 잣대 사람의 잣대에 기대어 살아왔던  모든 습성을, 마음을, 생각을 끊고 결단하며 바꾸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회개'란 마음이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하셨는데요 더 이상 사람이 만든 사람의 나라에 안주하며 사람이 만든 나라에 매달리거나 집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고 있을까요? 어디를 향해 살고 있을까요? 지난 시절의 삶의 습관과 마음과 생각을 끊고 하나님 부르심을 따라갈 마음의 결단을 하고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내 힘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적인 미련으로 세상 것에 머물러 있을까요?
  
하나님께 구하고 따르기
  
그런데요 하나님이 부르시고, 명하셔서, 결단하고 각오하며 하나님을 따랐던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예수님 증인이 된 제자들은, 따라나선 후에 언제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한결 같이 살았던 것은 또 아닙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께 등돌릴 때는 여지없이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아브라함 사례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정들고 익숙했던 고향과 가문과 아버지 집을 떠났지만 하란을 떠나 머물게 된 가나안에서 흉년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집트로 다시 또 떠나게 되지요. 그러나 하란을 떠날 때와는 달리 아브라함 마음에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아내 때문입니다. 제국의 왕이 아내를 취하고 자기를 죽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히브리어 표현으로 보면 이집트의 왕 바로는 아브라함 아내 사라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살고 싶었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구한 후 그 댓가로 많은 부를 얻기까지 합니다. 12장에서 이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이 일이 하나님 뜻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거든요.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 사태를 바로 잡으십니다. 바로에게 가셔서 사라를 내놓게 하신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서 신학자들도 해석이 구구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바를 충직하게 따라 길을 떠났지만 그 후 언제나 하나님 기준대로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엉뚱한 길로 나가는 아브라함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또 따랐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 세상 주도권이,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라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꾀를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보시지 않았지요. 창세기 18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뽑아 세워서 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에게 공의와 정의(옳고 바른 일)를 지시하여 이 야훼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려고" 하셨다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 사라가 누이라고 속인 것은 바른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걸 재앙을 통해 바로에게 분명하게 하시고 사태를 바로 잡으셨겠지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낳을 여성이 아니었던가요? 그 소임을 띤 여성이 제국의 왕 바로의 아내가 되다니요.

  이삭의 탄생과정도 세상 주도권이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처음에는 자신들이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형의 아들인 조카 롯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사람의 제도 사람의 방식이지요. 그 사람 방식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롯과는 헤어져야 했으니까요.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끼리 싸워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해 분가해야 했습니다. 양자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니 사라는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보라며 아브라함을 설득합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지요.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드디어 아들이 생겼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 때문에 사라는 하갈에게 멸시를 받게 됩니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는 셈이지요. 결국 이스마엘과 하갈 역시 멀리 떠나게 됩니다. 사람의 방식으로는 하나도 성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방식으로만 가능했지요. 아브라함과 사라마저 믿을 수 없었던 일, 구십이 넘은 이가 잉태를 하게 하시고 이삭을 낳게 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야기는 인간은 하나님만을 따라야할 존재이며 허약해서 혼자 힘으로는 하나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앞장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앞장서십니다. 인간은 그 뒤를 따를 뿐이지요.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허약한 인간이 앞장을 설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부름을 받아 생업과 가족을 떠납니다. 특별한 결단이고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남들보다 잘난 게 있다거나 더 똑똑하거나 힘이 있어서 선택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그들을 선택했는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부름을 받고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못 알아듣고 경쟁하고 심지어는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정하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 인생 전체가 하나님이 부르시고 순종하고 개입하시는 과정의 연속이었듯이 제자들 역시 자기가 살던 삶을 떠나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인간적인 습성에 욕구에 휘둘려서 실수하고 잘못하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시고 말씀하시고 용서하시고 부르시는 과정에서 회개하고 변화하며 결국은 순교자로 삶을 마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시지 않으면 홀로 뭐하나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지요. 불러주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허접하기 그지없이 사는 것이 인간일 뿐이지요. 물론 유다처럼 죽을 때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지도 못한 채 홀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제자가 있기도 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자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아브라함의 삶과 제자들의 삶에서 비슷한 교훈을 찾게 합니다. 주도권이 확실합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부름을 받고 떠난 후에도 계속헤서 인간적인 습성과 인간적인 욕구, 욕심, 두려움을 싹 다 버리지 못한 채 퇴행하기를 거듭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 회개하고 변화하고 결단하고 세속적인 삶에서 떠났다고 해서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하면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고 회개할 것이 없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따르고 떠나기, 끊임없이 회개하고 따르기

  언제나 되돌아가고 흔들리며 하나님과 멀어지곤 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에 기대 구하고, 부르심을, 마음 바뀜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제대로 듣고 따르고자 눈을 뜨고 귀를 열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허약한 인간이 앞장을 서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이 앞장 서시는 걸 뒤에서 따라가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눈뜨고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잣대삼아 회개하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예수사람 마음으로 바꾸어갈 뿐입니다.

  더러 왜 나는 아직도 이대로인가, 이 모양인가, 왜 변하지 않는가,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좌절하는 기독교도들을 봅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나만 이모양이라고 괴로워하는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번의 부르심과 한 번의 순종으로 한 번에 싹 다 인간의 습성과 마음과 욕구와 생각을 버리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지요.

  남들 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실제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지요.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도, 한 번 떠남을 결단하고 무언가 바뀜을 경험했다 해도, 인간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 말씀에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태도로, 이웃과 함께 구하고 듣고 따르며 계속해서 회개하는 삶, 그 이상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과 제자들이 하나님 부르심을 귀히 여기고 심각하게 받아안고 결단하며 따랐던 그 순간의 선택과 삶이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본토와 가문과 아비의 집을 두고 떠나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던, 하나님을 가장 우선시 헸던 그들의 태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 살면서 예람 모두의 삶의 본이 된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늘 인간과 다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의 사랑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높이는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도 하니님 앞에서는 부족한 인간의 지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니까요. 마음까지 바꿔서 마음이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하시니까요.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더 높은 기준으로 살아야 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날마다 회심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인간 혼자 힘으로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교회가 필요하고 교우가 함께 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예외없이 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회개하는 일은, 세상과 단절하고 결단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요. 인간의 잣대,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 잣대로 자기를 돌아볼 때 얼마나 심각하게 반성할 일 투성인가요. 어떻게 죄없다 말할까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잘못 봤습니다. 잊었습니다. 놓쳤습니다. 제 욕심이었습니다. 못 살폈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웃을 너무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고백하며 변화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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