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857   1/43

 내용보기

작성자


이인미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mindfirst

제목


하늘나라에 들어갈 ‘나’는 어떤 사람인가? (2020년 7월 19일)
제목        하늘나라에 들어갈 ‘나’는 어떤 사람인가?
찬송        39장 주 은혜를 받으려/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성경        마태복음 6:7, 7:21-23, 고린도전서 12:3-7
교독        60. 시편 139편

1. 여는글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여호와)를 직접 부르지 않고 경외하는 심정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유대교식 표현방법입니다(독일성서공회 해설관주성경). 따라서 ‘엄마’와 ‘어머니’가 동일한 사람을 지칭하듯, 하늘나라와 하나님나라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빈번히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하늘나라(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인간의 모습에 대한 성찰입니다. 누구 다른 인간의 속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의 속을 저마다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나의 속사람’을 성찰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롬7:22, 고후4:16, 엡3:16 등). 이를 위해 오늘 설교자는 두 질문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가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나라(하늘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그 하나님나라에 인간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 하나님나라와 복음전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마가복음서의 기록인데, 이는 마태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서 기자는 예수님 말씀을 직접인용하지는 않고,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고 서술했습니다(마4:17). 그런 다음, 이를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풀이했습니다(마4:23). 예수님은 이후에도 하나님나라를 중요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일례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주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믿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마6:10).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는, 일흔두 명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병자를 고쳐준 후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10:9). 또, 요한복음서에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3).

하나님나라는 묵시문학적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 초기 묵시문학에서 꽤 묵직하고 절실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 전통이 되어 대대손손 계승되었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며 그리는 이스라엘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구약의 묵시문학인 다니엘서는 그와 같은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이 세상을 끝장내시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신다(단7:13-14), 그것이 다니엘서가 뜻하는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이때 하나님나라의 의미는, 하나님을 세계의 중앙에 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체제를 뜻합니다. 이는 다윗 왕조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과거의 재현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신앙은 민족적,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는 내용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는 ‘세속적, 현세적, 민족(집단)적’ 하나님나라를 연상하도록 은근히 그러나 강력히 유도합니다. 세속적 의미의 정권창출, 혁명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그와 같은 하나님나라 이미지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나라와 저 세상

그러면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미의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 것일까?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입니다. 사실 ‘나라’라는 단어는, 어떤 특정한 경계가 있는 영토, 정부기관이나 법제도를 갖춘 국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세속적, 현세적, 집단적 의미의 나라에 하나님나라를 가둬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나라를 이해하게 되면 (인간 언어의 한계 때문인데) 또 다른 미묘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인간이 현실에서 체험하는 경우는 드물거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하나님나라는 저 세상의 것, 지금이 아닌 장래의 일, 죽음 뒤에 비로소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이릅니다. 추상적, 내세적, 개인적 의미의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상적, 내세적, 개인적 의미의 하나님나라 이미지에만 갇혀있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벌써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언행 속에, 예수님의 존재 안에, 예수님의 인격 가운데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례로, 누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주의 은혜의 해’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신 후,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고 보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4:21).” 누가복음서의 또 다른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확언해주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눅11:20).”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4. “주님, 주님”하고 부르짖음은 무엇?

본문말씀의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 주변 기독교인들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최근, 성소수자를 축복하였다는 이유로 소속교단에서 재판받고 있는 이동환 목사는, 누구 다른 부류의 사람들한테 재판을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목사와 똑같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따를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같이 들어서있는 사람들,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 즉 같은 교단 목사들에게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진짜 기독교인이고, 이 목사를 재판하는 교단 재판부의 목사들은 가짜 기독교인이다, 이 목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교단 재판부의 목사들은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간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먼저 그 판단의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하겠습니다. 교단 재판부 목사들은 ‘주님’을 부르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 기도가 가짜인지, 위선인지,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자부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본심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이슈가 되어있는 이 즈음, 마냥 판단을 유보한 채, 난 모르겠다, 난 누구 편도 들지 않을란다, 중립이다, 이같이 주장할 수만은 없습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서 뒤로 물러서있기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의 신앙의 속살을 관찰하려 하고 판단하려 하면 우리는 금방 어려움에 빠집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바깥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을 근거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것조차 무엇인지, 부정확할 때조차 있습니다. 오죽하면 성 어거스틴이 “나에게 내가 문제가 됩니다(I have become a problem to myself)”라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런 데다 인간들 중에는 외식하는 위선자, 자신의 거룩한 종교성을 뽐내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말과 행동이 다를 가능성을 잠재한 존재들입니다.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간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그러나 성령에 의한 고백 이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간은 자기가 고백한 그대로 살지 않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람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실은 콕 집어 바리새인 집단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바리새인 같은 ‘신앙의 위선자’들은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온 세대를 통틀어 존재해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니 어쩌면 나도 그런 축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어느 때나, 신앙인에겐 깊은 자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5. 말과 행동을 같이한다는 것은 무엇?  

일상생활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언행의 불일치, 말과 행동의 부정교합은 뜻밖에도 드물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예로, 최근, 수십 년간 자칭타칭 남성페미니스트였던 한 유력 정치인이 반(反)페미니즘스러운 범죄행동, 즉 성추행 의혹을 받고 세상을 등진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성고문 피해자를 변호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서울대 신정휴 교수 사건(일명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때에, ‘성희롱’이라는 용어를 대중적으로 퍼뜨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시장의 권한으로 세월호 천막을 보호하고, 성소수자들의 퀴어축제를 비호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여성단체나 인권단체 활동가들에게 거의 ‘동지’ 격으로 인정받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2년 전, 비서 성폭행 사건으로 안희정 전 지사의 재판(1심)이 끝나자 “피해자를 기준으로 판결했었어야 했다”며 그 재판결과를 비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추행 피고소인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력 정치인만 그런 문제를 안고 있을 리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만 그런 문제가 발견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언행의 불일치, 말과 행동의 부정교합은 자주 목격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기독교인이 온화한 미소를 띄고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주시고 (…)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감동적인 간증입니다. 이 말은 영화 <밀양>의 등장인물 ‘도섭’이, 자기가 살해한 아이의 어머니 신애 앞에서 “죄송합니다, (저를)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면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도섭의 이 간증이 나오기 전까지 신애는 도섭 앞에서 아주 온화한 미소를 띄고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했었습니다. 도섭과 신애에게서 우리는 말과 행동의 부정교합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흘깃 엿볼 수 있습니다.

6. 닫는글: 나는 무엇?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부정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의 장, 즉 6장 7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마6:7)“라는 권고도 하셨습니다. 그 말씀과 오늘 본문은 언행의 불일치, 부정교합을 경계한다는 주제의식 아래 묶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말과 행동이 일으키는 부정교합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교합이 상당히 대중적이라는 사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 대중성 속에 ‘나’는 예외야, 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아니, 그런 주장을 해도 될까요? 인간 이상의 인간이라고 나 자신을 띄우는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무겁게, 정말 심각하게, 나 자신에게 적용하여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인간은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지 않아도 우리는 말과 행동 사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상실하곤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금 말로 합리화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ev
 버리고 따르는 예수사람
한문순 2020/07/19 154
Next
 시험받는 사람 7월 12일
김지은 2020/07/19 154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