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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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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2020년 6월 21일)
제목        가난한,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찬송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5:3, 누가복음 6:20-21
교독        75. 마태복음 6장

1. 여는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 한 번 해봅시다 하면, 사람들마다 구구절절 서로 다른 사연들이 터져나옵니다. 그 사연들 속에는 가난을 바라보는 조금씩 상이한 관점들이 녹아있습니다. 우선 각자의 가난 경험치가 다릅니다. 직접경험, 간접경험의 차이도 있고, 가난의 강도와 지속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또 가난을 겪는 감수성과 인내심에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는 가난에 대한 반응으로 생성된 감정들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같은 가족끼리도 다릅니다. 앞으로 나나 내 자식이 가난을 겪을세라 걱정이 태산같이 높은 부모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와중에, 가난을 향유할 것인지, 감당할 것인지, 극복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해결할 것인지, 혐오할 것인지, 지양할 것인지, 지향할 것인지…, 가난에 대한 의견이나 결론(?)도 사람마다 몹시 다르게 나타납니다. 방금 전 가난을 거론하는 문장 가운데 설교자가 열거한 ‘향유, 감당, 극복, 저항, 해결, 혐오, 지양, 지향…’ 등의 단어선택에 대해서도, 그 단어들을 듣는 순간, 벌써 질문이나 반론을 떠올린 선생님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사실상 너도나도 똑같이 ‘기역, ㅏ, 니은, ㅏ, 니은’의 다섯 음소로 구성된 두 음절 단어를 발음하며 대화를 할지라도, ‘가난’이 주제인 한, 우리의 대화는 단일한 결론에,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지라도,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럴지언정 우리는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안들에서도 사람들은 분노하지만, 아직도 계속되는 위안부 할머니 관련기사들에서도 드러나듯, 특히 가난 문제, 돈 문제에 대해서 더 열심히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은 없어진 적이 없습니다(막14:7, 요12:8).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가난에 대하여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도 가난을 중요하게 거론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의 한두 구절 속에서 찾아지는 ‘가난’의 의미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이 두 본문은 이른바 ‘병행(평행) 본문’인데, 마태복음서 본문은 산상설교로 불리우고(마5:1), 누가복음서 본문은 평지설교로 불리웁니다(눅6:17). 두 본문 모두 예수님의 설교로서, 가난을 하나님의 나라에 밀접하게 연결하여 제시합니다. 이 두 본문을 가지고 우리는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의 가난, 이 사회의 가난, 온 세상의 가난뿐 아니라 나 자신의 가난에도 적용하면서, 신앙 가운데 가난을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가난한

누가복음서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가난의 문자적 의미를 떠올리게 됩니다. 곧 ‘물질적 가난’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없고, 입을 것이 낡았거나 결핍되어있고, 잠잘 곳이 불편하거나 마련되어있지 않은 등 삶의 필수요소들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상태, 그 같은 필수요소들을 확보할 돈이 없는 상태를, 성서도 가난으로 지칭합니다. 이걸 지시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이’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그리고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프토코이’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너무 가난하여 빚을 지거나 심지어 구걸해야 하는 상태까지 이른 가난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엔 그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먼저 이 단어는, 여러 히브리어 단어들을 받은 헬라식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어떤 히브리어 단어를 받았는지에 따라 가난의 ‘어떤 측면’을 집중적으로 가리키게 됩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 프토코이는 우선 히브리어 ‘아니’라는 단어를 39회 받았습니다. 이 단어는 “고통받는다”는 중심뜻을 갖고 있습니다. 또 프토코이는 히브리어 ‘달’을 12회 받았습니다. 이것은 “천하다, 약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프토코이는 ‘에브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도 10회 받았습니다. ‘에브욘’엔 “가난뱅이, 거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프토코이를 한국어성서는 대개 ‘가난’으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다가, 가난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우리는 위와 같은 여러 의미를 모조리 다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의미들을 때로는 분별하고, 때로는 통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대체로는 거의 반사적으로 물질적 가난을 떠올릴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에서 여러 다른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난하니까 고통받는다, 가난하니까 천하게 취급당한다, 가난하니까 약하다, 가난하니까 무시당한다”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전개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구조는 아마도 대중적, 상식적, 일반적인 듯합니다. 이 사고구조를 통하면 고통의 원인, 천함의 원인, 약함의 원인이 가난으로 밝혀집니다. 인간을 부정적 상태로 몰아넣는 ‘무엇인가’가 여럿일 수 있는데, 그중 하나의 정체를 가난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가난은 몹쓸 것 중 하나, 문젯거리 중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혹 사람에 따라 어떤 이들은 가난을, 몹쓸 것 중 최고로 몹쓸 것, 문젯거리 중 가장 최대의 문제, 그렇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셨는데 그 청중이 제자들입니다(눅6:20).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6:20).” 여기 “너희”라는 표현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세리였던 마태는 아마도 제외?). 또, 예수님도 당시 기준으로 분류해볼 때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눅9:58). 예수님 스스로,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음을 말씀하기도 하셨고(눅9:58), 부유한 몇몇 여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의 생계를 돌보기도 했습니다(눅8:3). 그래서인지, 누가복음 주석서를 쓴 하워드 마샬(Howard Marshall)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이 설교가, 세상 수준의 가난한 삶을 살아갈 ‘각오’를 할 수 있도록 설득력있게 인도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각오가 선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어떻든 그때 당시 제자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공동체에 들어온 거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은, 초대교회 때도 그랬습니다만, 어느 지역에 들어가든 전파 초기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복음에 반응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사는,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고합니다. 동시에 기독교인의 압도적 다수가 가난한 사람들 계층에서 배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보고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한편, 마태복음서는 “너희”를 거론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설교가 겨냥하는 메시지는 달라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나라와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메시지는 그대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음”이라는 낱말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 그러면, 마음이 가난하단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물욕 없는 마음?! 예수님은, 이 마태복음서의 산상설교를 통해 이를테면 ‘청빈’을 권고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지금의 우리와는 달리, 그 순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모든 청중은, 다 유대인입니다. 유대교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 소리를 듣자마자 구약의 전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가난한 사람은 곧 의로운 사람’입니다. 구약시대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대중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은 언제나 강조되었습니다. 단, 가난이라는 속성이 언제나 의로움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례로 욥은 부자였을 때에도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구약성서는 증언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관계 맺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주석서를 쓴 신학자 에두아르트 슈바이처(Eduard Schweizer)는, 마태복음서의 기자가 의로움의 면에서 볼 때, 가난이라는 속성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구약전통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마태복음서 기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간단히 표현하면 자칫 의미혼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마태복음서 기자는 무척 신중해졌습니다. 그 결과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기록이 파생됐다고 슈바이처는 해석합니다. 그런 해석도 물론 가능하지만, 예수님이 공생애 중 이런 주제로 단 한 번만 설교하신 게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어느 때엔 “가난한 사람” 또 다른 때엔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하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허나 그 어느  쪽이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전통에 비추어 예수님의 설교를 다시 이해하고자 할 때 “마음이 가난한(표준새번역)”보다는 “심령이 가난한(개역개정)”이라는 번역이 더 적합해 보이는 감이 있습니다. 가난 자체보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가난 개념을 활용한 것이 ‘가난한 사람=의로운 사람’이라는 구약전통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마22:37)” 말씀하실 때에는 ‘심령(프뉴마)’이 아닌 ‘마음(카르디아)’이란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셨다는 점은, 개역개정 번역에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청빈을 추구한다거나, 물욕에 저항한다거나 하는 마음가짐과는 다른 차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듯합니다. 물론 청빈은 악착같이 부를 축적하려는 것보다는 훌륭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의 본문은 더 높은 차원을 지향합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의지로, 결심으로 이루어내는 윤리적 차원, 그 이상의 지평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심령의 가난’은, 그래서, 청빈이나 청렴 같은 인간의 업적으로 내세워질 수 없습니다. 가난은 윤리적 자부심의 근거도 아니고,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 다른 ‘안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서 본문은,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나라와 연결되는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 안에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믿는 순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이는 기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이 모두 보이는 “복이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소관으로 복이 주어진다, 복을 받는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서 기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기록함으로써, 가난이 다만 물질적 사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영적 사건으로 재현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즉,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적 사건으로 가난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가난은 고통의 근거가 아닙니다. 아니, 고통의 근거가 아니어야 합니다. 천함이나 약함의 이유도 아닙니다. 천함이나 약함의 이유를 가난에 귀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가난은 하나님의 복을 ‘있게’ 하는 요인입니다. 가난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나라에 직결됩니다.

4. 닫는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믿는 그 순간, 가난한 당사자들은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청중 가운데 자기가 비교적 물질적으로 부유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존재가 열리는 것을 또한(!) 체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눅18:25), 예수님의 말씀에 휩싸이는 그 자리에서 경험한 셈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자기 존재가 열리는 구원의 체험을 한 번 하게 되었지만, 그 사람들은,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은 어쩌면 그들에게 다시금 일종의 실제적 문젯거리로 감지되었을 수 있습니다. ‘도루묵’이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항상 예수님의 말씀에 휩싸여 살지 않는 한, 그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체험한, 체험하고 있는, 체험할 가난은 우리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사건에 연결시켜주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대단한 결심이나 갸륵한 결정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 온 존재가 휘몰아쳐 들어가 하나님만이 주님이심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적 사건에 들어서있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차원의 문을 우리 앞에 열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에 굶주려있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오늘도 새롭게 지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로 만들어주심과 동시에, 세상 수준의 가난을 다루거나 돌파할 영적 힘도 주심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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