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1015   1/51

 내용보기

작성자


한문순

제목


믿음, 소망, 사랑 -갈라디아서 13
시편 139: 23-24, 갈라디아서 5:2-15
교독문 47. 요한복음 15장
찬송 134 감람산 깊은 밤중에 135 갈보리산 위에 330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1.     
   
바울이 그리스도 복음에 근거해서 보기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고(5:4)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에 의지하지 않고, 할례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이었고 이방신을 섬기며 자기네 풍습 안에서 그들의 공동체의 관례에 따라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복음을 접한 후, 그 오랜 문화의 관습을 버리고, 새 삶을 맛본 이들이었습니다. 절대적인 줄로만 알고 믿었던 모든 인간의 관습을, 한낫 인간의 것으로 바라보고 상대화 했던 그리스도 복음은,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모든 인간적인 문화를 거룩한 세계와 구별 짓게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기독도들은 당시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양상은 가족과, 혹은 친구와 등을 지거나, 작던 크던 그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며,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면, ‘유대인도 헬라인도 노예도 주인도 남성도 여성도 없이’ 동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니 당대 질서와 긴장과 갈등할 일은 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은 가난하고 박해 받는 삶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할례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2.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긴 했지만 오랜 전통과 자기들만의 민족적 유대와 관습, 신앙으로 한 민족으로 뭉쳐 서로 지켜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국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이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며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의 의심과 눈총을 사야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로워 보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류 유대교도들은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소수자 중의 소수자였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구별됐습니다. 그때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이야 기독교인이 허다하게 많지만 당시는 초대교회 시절이니 더더욱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 속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은 무수한 어려움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성경말씀에 따르자면 인간은 수시로 흔들리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그 뜻을 향하다가도, 육신의 욕망에 걸려 넘어져 엉뚱한 길에 들어서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방향을 잃곤 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벗어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오고자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이웃과 교통합니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침투를 거부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의와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원래의 형상에 따라 선한 존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의 종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인간의 뜻을 앞세우고, 인간 욕심에 사로잡혀 그것을 고집하며, 성령과 성도들과 교통에 실패하면 인간은 주인 자리를 쉽사리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에게 내어줍니다. 인간은 쉽게 휘둘립니다. 속살거리는 뱀의 유혹에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욕심과 교만이 고개를 든 탓에, 스스로 하나님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에덴 낙원에서 추방되어 떠나야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4.

새 삶을 맛보고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교사들을 만나 흔들리며 등돌리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가르침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교만과 무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5:8)을 모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고도 쉽게 확신합니다. 무지한 확신에 차서 거짓교사들은 카리스마 넘치게 화려한 언변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에 기대어 인간세상과 다른 공동체와 삶을 영유하던 갈라디아인들에게 더 쉬운 길로 확실한 구원이 가능한듯 현혹시켰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비방하여 갈라디아인들을 의심에 빠지게 했을 수 있습니다.

5장에서조차 그런 점이 엿보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이 내가 할례를 선포하고 있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라고 한 구절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할례 받게 했던(행16:1-3) 것처럼, 할례를 하게 하기도, 하지 않게 하기도 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를 선포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중요한 구원의 요소를 누락시킨 문제적 행위인양 거짓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을 비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말의 본 뜻, 정수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 형식에 치중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흔한 현상입니다. 안식일 등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해와 준수가 달랐던 예수님 말씀 역시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렇게 읽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비슷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5.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은혜의 취소’(5:4)를 경고합니다. 자칫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혼란 속에서 말씀의 빛이 비춰져야 했을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황은, 신앙의 고비였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이런 일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만큼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참고할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5절과 6절 말씀이 실마리입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했으니까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모두 거론합니다. 눈에 보이는 할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에 힘 입은 믿음을 따른다고 합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단번에 주어지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합니다. 예수 재림이 곧 임박했다고 믿었던 바울에게 그것은 자연스런 이해였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므로, 소망을 갖고 그 소망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눈에 보이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교사들에게 휘둘려 엉뚱한 데를 바라보고 헛된 고민과 탐구에 빠져 있습니다. 바울을 의심하고 배척하면서요. 그들은 성령에 힘 입기보다 할례에 힘 입고자 하고 미래의 의의 소망을 기다리지 못한 채 지금 그것을 확신하고 보장받고자 하며,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이 아니라 의심과 원망에 빠져 인간적인 다른 것에 눈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보다 물어뜯고 삼킵니다.

성령에 힘 입는 믿음이 있다면, 인내하며 소망을 품고 기다리겠지요. 오늘날 손쉽게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기독교도와 달리 초대교회의 기독교도들에게는 박해받는 일상의 삶이 기본이었으니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믿음, 속된 세계와 거룩한 세계를 구별짓도록 돌보시고 주장하시는 성령께 귀가 열려, 그에 힘 입는 믿음이 아니라면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는 소망을 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내 목소리와 다른 성령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 귀가 밖으로, 성령께 열려있는가? 기독교도라면 우선 이 점을 늘 회개하며 구해야겠지요. 그리고는 미래에 의롭다 하실 것을 소망하며 십자가를 따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고난의 상황을 기다리며 인내하는가? 이 또한 회개하며 구해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셨습니다(1:4). 할례냐 무할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의미 있는 것인데, 우리는 정작 무엇을 부여잡고 있는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성령께 구해야하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자 하는 기독교도라면 이 세 가지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며 솔직하게 예배 드리고, 성경을 읽으며, 성도와 서로 교통해야함을 바울 사도는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6.

바울은 인간을 건지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목숨값으로 주어진 자유를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뜻을 위해 오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율법의 정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줍니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요. 할례 같은 지엽의 문제에 빠져들지 말고 정작 중요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일러줍니다. 서로 물고 삼키면 서로 멸망할 테니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령에 힘 입은 믿음과
의의 소망과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시는 당신의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저버리며
쉽게 흔들리고 동들리는 저희를 용서하시고
저희 스스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소서.
계속해서 불러주소서.
간절히 외치는 성령님의 호소에 귀 열게 하시고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rev
 주께서 보이신 겸손
김지은 2023/02/26 182
Next
 그 한사람, 잃어버린 자
김지은 2023/02/26 182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