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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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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문순

제목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이익이 있는가
330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431 나 주여 뜻대로
493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교독문 49 빌립보서 2장

창세기 25:27-34
히브리서 12 : 14-17


에서와 야곱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주 긴 기다림 끝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동족인 리브가와 혼인하여 역시 긴 기다림 끝에 에서와 야곱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쌍둥이지만 에서가 첫째입니다. 야곱은 둘째이지요. 장자권이 인정되는 시대이기도 했지만 짐승의 맏배, 곡식의 맏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였습니다. 쌍둥이더라도 에서가 장자이니 앞으로 이삭의 축복을 받게 돼 있었습니다. 장자인 에서에게 내려질 축복의 내용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며 아버지의 사업과 재산을 상속 받고 종족을 이끌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장자권을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깁니다. 생각해볼 면이 아주 많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1.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에서

히브리서는 신약에 포함돼 있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섬기는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으로부터 고초도 겪고 교인들 사이에 분란도 겪습니다. 목회서신이라는 편지들마다 그런 흔적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교회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직 ‘기독교’라는 말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시대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믿음은 흔들립니다. 예수를 의심합니다. 옛날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따르도록 편지를 통해 성도들에게 여러 각도로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창세기의 에서 이야기를 들고 있습니다. 한 그릇 끼니를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망령된 자라 이릅니다. 장자권을 판 이후에는 축복과 기업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지만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망령된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문지방을 넘는다는 의미에서 특히 종교적으로 의미를 지닙니다. '거룩함의 개념과 일치되지 않은' 사람과 관련해서 '불경한, 세속적인, 신성모독적인' 이라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에서는 불경한 사람,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는 뜻이지요.

목마르고 배고파 팥죽에 눈이 팔려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사실은 인간의 눈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 일은 아주 다반사니까요. 그러나 그 때문에 에서는 장자가 축복을 받고 기업을 물려받아 종족을 이끄는 당대의 문화적 관행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면서 장자권을 넘겼으니까요. 그래 놓고는 훗날 동생인 야곱이 축복과 기업을 받게 되자 대성통곡을 하며 웁니다. 되돌려보고자 매달립니다. 그러나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당장의 목마름과 배고픔에 사로잡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채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한 에서의 문제를 환기시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도 당장 인간에게 중요하고 익숙한 것보다 당장 궁한 인간적인 욕구와 배고픔보다 더 중요한 신의 평화와 ‘신을 위하여 헌신’하는 거룩함을 좇아야 했으니까요(12:14). 히브리서는 성도가 모두 함께 평화와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에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에서처럼 세속에 빠지고 인간적 잣대에 사로잡혀 더 중요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잃고 엉뚱한 선택으로 빠져 들곤 하니까요.        

2. 에서가 태어나기까지

서두에서 밝혔듯이 아브라함은 에서의 할아버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지요. 그는 우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나안으로 이주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십니다.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나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라고요. 이것이 장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그의 부인 사라는 긴 세월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백세 가까이 돼서야 에서의 아버지 이삭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출산이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 가문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가문이자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번제단에 올릴 만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 여성이 아니라 동족에게서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따라는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찾아낸 여성이 리브가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한 종을 파견하여 동족을 찾아 멀리 떠나 보냅니다.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은 걸맞는 여성을 찾아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대로 나그네를 섬세하게 살펴 환대하며, 참하게 행동하는 여성 리브가를 찾아 냈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은 축복을 받았던 여성입니다. " 네 씨로 크게 성하여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라고요.

아브라함과 리브가에게 내렸던 그 축복이 장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을 하고 사라처럼 오래 기다린 끝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쌍둥이들은 뱃속에서부터 다툽니다. 그때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인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요. 리브가는 두 아이의 미래를 알게 됩니다.

3. 에서의 세속성  
아이들이 자라면서 정말 그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말씀이 현실이 되는 가운데 에서가 장자권을 야곱에게 파는 사건이 자리합니다. 사냥을 잘하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는 에서의 행동은 거침 없어 보입니다. 그날도 에서는 들에서 돌아와 죽을 쑤고 있는 야곱을 보고 말합니다. 그 죽을 달라고요. 야곱이 형을 위해 죽을 쑤고 있었는지 그게 누구의 죽이었는지 얼마큼의 죽이었는지를 성경이 알려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쑨 죽입니다. 야곱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을 달라는 형에게 야곱은 장자권을 팔라고 요구합니다. 그랬더니 에서는 너무 쉽게 장자의 명분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립니다. 목마르고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요.

에서는 축복과 기업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종족을 번성케 하며 이끌어가는 중차대한 장자권을 가볍게 던져버립니다. 나중에 에서가 이 일을 후회하며 대성통곡하는 걸 보면 장자권에서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에서가 세속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에서의 특징은 그가 결혼할 때도 드러납니다. 26:34-35절에 보면 에서는 동족 여성이 아니라 가나안 여성들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이 근심 되었다고 성경은 쓰고 있습니다. 앞서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아브라함과 신실한 종이 애썼던 과정을 떠올려보면 사뭇 비교되는 사건입니다. 가나안 여성과 결혼한 에서의 선택은 그가 거룩함과 축복의 조건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결혼을 위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니까요.        

4. 다시 히브리서로

히브리서 12:14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와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권면하며 에서의 이야기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에서에게는 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화와 거룩함에 순종할 때 비로소 주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이 들려야 분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요.

사람을 혹하게 하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욕구들은 차고 넘칩니다. 당장 해결해야할 목전의 일이 사람을 다급하게 합니다. 그럴수록 삼가고 조심하며 우리가 우선시해야할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은 것이겠지요.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를 따 먹었다지만
인간인 저희는 미욱하고 어리석기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주신 축복보다
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내 필요를 앞세워 하니님이 주신 사명에 등돌리곤 합니다.
매일매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평화와 거룩함에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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