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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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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우리의 믿음, 어떠한가?
본문 창세기 3: 1-6; 마태복음 6: 13/교독 14번(시편 46편)/찬송 24, 171, 351


1. 열면서:

‘믿는다’는 낱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인정하든 않든 모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재력이나 권력을 믿든, 이념이나 체제를 믿든, 능력이나 판단을 믿든, 자기 자신이나 어느 다른 사람을 믿든 뭔가를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떠받들며 기대고 따릅니다. 사람인 한 그렇습니다. 이 점에서 인간이란 ‘믿는 존재’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주제에 이어,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함께 새겨보면 합니다.


2. 믿음의 갈래:

아메리카 대학 이야기입니다. 20여 종파에 속한 40여 명의 교목(chaplain)들이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데, 이들 교목의 협의체를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로 ‘무신론자’가 선임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뜻과 힘으로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자들을 오래 동안 돌보아온 무신론‘교’(?)의 교목이었습니다. 400년쯤 전에 청교도들이 세운 대학에서 벌어진 일이라 곧바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화제에 덩달아 끼어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예수 사람’으로서 ‘인간’을 믿는 그 믿음에 대해서는 새겨 볼 수 있고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게 무신론자라고 하면 험악한 얼굴 표정에 조롱하는 눈빛을 내보이면서 종교란 기만이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는 지식인이나 별 생각이 없는 시정인을 떠올리는데, 이 ‘교목실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성 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지 않습니다. 호전성도 공격성도 갖지 않습니다. 너그럽습니다. 여러 종교의 신앙 전통과 소통코자 합니다. 관용을 표방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이 말하는 ‘진리’가 단숨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고 모든 물음에 해답을 주는 유일한 정답이라고 강변하는 사람이 있으면 ‘산으로 도망을 가거나’, 그럴 수 없다면 ‘돈지갑은 숨기라’고 부드럽게 조언할 따름입니다. 자기가 전하는 진리가 절대라고 억지 부리는 자들이라면 그에게서 떠나거나, 돈을 떼일 수 있으니 돈주머니를 잘 챙기라며 은은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유쾌한 무신론자이고 온순한 무신론자입니다.

기성 종교 집단과 그 집단의 믿음을 전하는 자들이 저질러온 횡포와 패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러한 조언을 무시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실제로 되바라진 현대인들이라면 종교를 내걸고는 자기 독선을 마구 휘둘러대는 무지함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옹고집을 부려대는 우둔함에 진절머리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는 수많은 믿음의 깃발들 사이에서 인본주의에 터한 ‘무신론’의 깃발 아래로 들어설 것이고, 나아가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며 ‘현대인다움’을 과시할 것입니다. 새로 선출된 교목실 책임자는 바로 이들 현대인에게 친화력과 호소력을 줍니다. 언필칭 개방성을 떠벌리는 이들 현대인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3. 우리가 믿는 바:

여기에 귀담아들을 것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하나님’을 불러대고 끌어대지만 그 하나님을 자기 입맛에 맞도록 각색하지는 않는지, 자기 편안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합니다. 툭하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좁고 이기스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욕심과 판단을 믿고 따릅니다. 생각과 행동이 추하고 가증스럽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축소하고 격하시키고 왜곡합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괴물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신론자’ 같으나 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믿는다하지만 자기 본위의 틀을 굳히면서 자기 본위의 생각에 마냥 빠져듭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나처럼 나이가 많아지면서 알 수 없는 여러 까닭이 뒤얽혀 이러한 구렁텅이로 떨어질 위험이 더 커지지 않을까 늘 염려하고 경성합니다. 이를 데 없이 모자라지만, 말씀에 비춰 나의 됨됨이를 새기고, 공동체 구성원 앞에서 나 자신을 추스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협소화와 집착화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전체가 그러하지만, 신약 본문으로 삼은 구절의 첫 마디 곧,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는 이 간구가 ‘나 자신’에 갇히지 않게 해 주십사 하는 뜻이 아닐까 해서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유혹이란 나 중심의 생각과 행동으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풀이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내 뜻을 내세우는 짓,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따르지 않고 내 의지와 판단을 받쳐 드는 버릇, 하나님의 기준보다 나의 기준에 맞춰 사는 삶, 이러한 데 기울어지고 이러한 데 빠져드는 시험/유혹은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에 잇대어 있습니다.

구약의 본문입니다. 에덴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나님이 명하셨습니다. 그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은 시험/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불순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지 않고 벗어났습니다. 이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 자기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고 만지지도 말라고 한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습니다.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만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을 지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좋다고 하지 않고 ‘내’/‘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좋다고 합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고는, 능청맞게도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시지만, 인간은 이러한 시험/유혹을 당합니다. 인간이 빠져드는 구렁텅이입니다.  

오만한 인간은 이 구렁텅이를 구렁텅이로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이 구렁텅이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전제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그 구렁텅이가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며 구렁텅이의 삶을 즐깁니다. 그 구렁텅이는 인간이 욕망했던 바의 결실이자 성취입니다. 넓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이라면 오늘날의 삶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근본에서는 그렇습니다.

말씀에 터한 믿음은 이러한 인간 중심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를 문제시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데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고 간구합니다.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따르지 말아야 할 나의 뜻을 따르는 이 어처구니없는 ‘나 중심’, ‘인간 중심’의 구렁텅이로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기스런 나 중심의 좁다란 생각과 행동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화답하는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우리는 간구합니다.

이 믿음은 ‘나’를 사로잡는 온갖 시험/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나’를 벗어나고 넘어서는 ‘자기 초월’의 의미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믿음의 이야기가 성경 첫머리부터 끝머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옵니다.  


4. 닫으며:

인간 중심의 무신론자들은 인간을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인간 위의 어떤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 말씀에 터한 하나님 중심의 ‘믿음’과 성경 말씀에 터하지 않는 인간 중심의 ‘믿음’이 구별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 해도, 이는 파멸의 길입니다. 아무리 옳고 바르게 보이는 것조차도 마침내는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치닫기 마련입니다(잠언 14: 12).

사람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이 올바르다고 ‘명’하시는 것은 같지 않고 다르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 하더라고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그 ‘명하심’의 뜻을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경에 터한 믿음의 증표는 ‘자기 긍정/주장’이 아니라 ‘자기 부인/부정’입니다.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인간 자신을 통하여 모든 선을 이루고 모든 덕을 세우고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뻔뻔스러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격상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실제로 위대한 신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이 규탄하고 현대인들이 비하하는 것처럼 자기중심의 독선에 빠져들지 않았고 자기중심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뻔뻔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개혁가이자 출중한 성경 연구가인 캘빈의 <주석서>에서 겸허한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 해 전 ‘성경 공부’ 시간에 그의 <기독교 강요>를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이점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함께 읽은 현대 신학의 대가 바르트의 책을 읽고 공부할 때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부족과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겸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겸허는 어정쩡한 후대인들의 불손하고 고약한 경직성과 크나큰 대조를 이룹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절대이고 ‘그리스도만’이 절대일 뿐,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풀이’는 결코 절대일 수 없습니다. 우리 예람교회에서 ‘공동 설교자’를 통하여 여러 ‘풀이’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것도 겸허의 자그마한 표현입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약합니다. 우쭐거리며 마구 나대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 없습니다.

인간 중심의 믿음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아무리 덕을 갖췄다고 해도, 아무리 책임을 다한다고 해도, 인간을 ‘이상화’하지 못하고 ‘절대화’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머물러 있는 온갖 ‘믿음,’ 자기 틀에 묶인 모든 ‘믿음,’ 그 믿음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자기 믿음을 넘어서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 믿음을 넘어섭니다.

이 믿음은 ‘자기 고착’을 넘어서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자기 지체’를 넘어서는 성장을 불러옵니다.  

여러분의 믿음, 어떠합니까? 어떤 믿음입니까? 나를 향하여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의 믿음, 어떠한가? 묻습니다.


<기도>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믿음’,
그 믿음을 넘어서는
믿음의 믿음,
더해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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