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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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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문순

제목


믿음
교독문 51. 히브리서 11장
새찬송가 534장 주님 찾아 오셨네 , 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486장 주 예수여 은혜를

에스겔 34: 11-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요한복음 10:22-3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1. 들어가며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음에도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개개의 삶에서 마주하는 위기부터 기후위기 같은 전 지구적인 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음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서 벗아난 채 살아갑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피폐함에서 비롯된 죄를 돌이키고 마음을 바꿔 회개하고 변화해야할 과제를 요구 받습니다. 은혜와 진리인 예수를 만나 그 안에 살면서도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세계에 머물러 살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우리가 왜 그러한지를 성경을 통해 구해 봅니다. 그러고자 성경을 읽고 함께 대화 나누며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옵니다.

성경을 통해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따르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몇 천 년 전 말씀을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낳습니다. 지금 동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언어가 저마다 달라 소통의 어려움을 낳는데 성경 이해는 오죽할까요?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언어를 쓰는 이가 가리키는 말의 실제 의미와 이미지는 저마다 제각각입니다. 살아온 배경에 따라 문화에 따라 이해에 따라 의도에 따라 언어의 실제 의미는 다 다릅니다. 그래서 소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 배경과 한계를 넘어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그대로 이해하기까지의 실상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도달하기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몇 천 년 전 기록을 두고 그 말씀을 이해하는 일은 얼마나 또 조심스러운 읽기의 과정을 필요로 할까요? 많은 분들이 실로 성령께 구하며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성경을 살피고 묻고 이해하고자 애쓰실 거라 생각합니다.
기독교도라면 삶의 위기와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말씀에서 근본의 이유를 찾아 밝혀 기독교도답게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하늘로부터 다시 거듭나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며 함께 그 의미를 구하여야합니다.

2. 캄캄한 세계에서 건지시는 목자

저의 지난 설교에서는 38년된 병자와 눈뜬 소경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과 9장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0장, 바로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눈뜬 소경의 이야기는 10장에서 목자와 양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앞 못보던 소경은 목자인 예수를 통해 눈을 뜹니다. 그 결과로 그는 회당에서 쫓겨나지요. 자신의 눈을 뜨게 하고 회당에서 쫓겨난 자신을 찾아온 예수를 그는 참된 목자로 알아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고 하셨듯이(10:14) 눈 뜬 소경은 예수를 따르는 양이 되었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 전통에서도 헬라 세계에서도 전해지던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34장은 구약에서 이미 전하고 있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원 전 6세기 말 이스라엘은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북이스라엘은 8세기 말에, 남유다는 6세기 말에 완전히 나라가 망합니다. 시절은 포로기로 접어들지요.

예배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무너지고 예루살렘은 남은자들과 이방인들이 뒤섞인 땅이 되어 버립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 땅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막연해집니다. 번영의 약속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따를만한 존재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그의 약속과 말씀은 다 무엇이었나? 자기 살 궁리에 빠진 목자들은 제대로 사태를 이해하고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로된 이스라엘인들은 신앙을 놓치 않고 말씀을 다시 붙들고 씨름합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자신의 색안경을 내려놓고 다시 말씀을 살핍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통해 말씀을 구하고 출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포로라는 처지와 정체성이 더 절실하게 말씀을 구하게 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니 지금 우리는 훨씬 더 절실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흐리고 캄캄한 나날이었습니다. 포로여서, 이방인들과 섞여서, 성전이 무너져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흐리고 캄캄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위기는 약속과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혼란에 있었습니다. 소경이 앞을 볼 수 없듯이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에 내던져진 길 잃고 흩어진 양의 처지였으니까요. 자기가 누구이고 말씀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알아볼 수 없는 캄캄한 현실이었으니까요. 힘 쎈 바벨론 제국의 왕에게 순종하면 목숨을 부지할까, 기를 쓰고 물질과 부를 축적하면 불안하지 않을까, 나라를 잃고 성전을 잃었는데 과연 내가 믿던 신은 믿을 만하고 따를 만 한 신이었는가? 흩어진 양들은 흐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에스겔을 찾으십니다. 그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십니다. 흐리고 캄캄한 날에 견져내시겠다고요. 소경이 눈뜨듯, 말씀을 듣고,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예언자가 캄캄함 속에서 헤매는 양들에게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양들을 견져내신 것이지요.

약하고 부족한 인간인 우리는 캄캄한 날들을 말씀없이, 약속없이, 믿음없이 스스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헤매는 인간들을 찾아오셔서 구해내신다 하십니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게도요.

말씀을 벗어나 마구잡이로 활개치며 살다가 망한 민족을, 회개할 줄 모르고 교만하게 살다 망한 이들을, 찾아오셔서 다시 건져내십니다. 쫓긴 자를 돌아 오게 하시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시고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십니다.

3. 서로 알아보는 목자와 양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오늘날에 되살리십니다. 오늘을 보게 하십니다. 스스로 비천한 몸으로, 사람으로 오셔서, 병든 자를 고쳐주고, 눈 먼 자는 눈 뜨게 하십니다. 죽으면 썩어버릴 육의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가르치십니다. 영의 세계를 알려주시고 하늘로부터 다시 거듭나야함을 촉구하십니다. 각각의 양의 이름과 각각의 양의 처지를 아시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과 자기 처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들은 그를 따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 사람들을 부르러 가듯이, 눈뜬 소경이 예수를 따라 나서듯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이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치면 세례자 요한조차도 처음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31, 33) 니고데모도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도 예수를 모르고 유대인들도 예수를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처지는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스로 알아볼 수 없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다하고 회개를 촉구하던 세례자 요한에게는 성령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자기가 알던 지식의 모순을 감지한 니고데모는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알던 진리에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는 안식일을 어겼다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던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알아본 예수에게 놀라며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아챕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르자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눈뜬 소경은 회당에서 쫓겨나와 예수를 따라 갑니다. 그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로 모여든 양입니다.

4. 예수님의 우리, 예수님의 성전

오늘 성경본문의 배경이 되는 수전절은 유대인들이, 주전 165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을 박해했던 그리스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에 항거하여 100여 년간 유지됐던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수전절에 성전 안 솔로몬의 행각에서 다니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행동입니다. 성전의 주인임을 드러내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이라 하셨습니다.(2:21) 유대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실상은 예수님이셨던 것이지요.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성전은 양의 '우리'이기도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예수를 알고 음성을 듣고 쫓겨난 양들을 한 데 모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지요. 헤롯왕이 새로 세운 성전은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처럼 출입자들을 제한해서 사람들을 갈라 놓지만 예수님의 성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양들이 한 데 어우러집니다.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곧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될 그런 우리, 그런 성전입니다.

5. 믿지 않는 양

그러나 우리 밖에서 성령도 볼 수 없고, 자기가 알던 지식의 모순도 한계도 감지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도, 성전의 새로운 의미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보는 게 불편했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눈 뜬 소경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둔갑시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의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영생을 주셔도 받지 못해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갑니다. 흐리고 캄캄한 세계에 남아 그 세계를 유지합니다. 그 세계를 강화합니다. 그 세계에 매달립니다. 육체와 함께 소멸할 그 세계를 말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모세를 따른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도 못합니다.(5:46)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5:42)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서로 영광을 취할 뿐입니다.(5:44)

인간으로 예수를 모르는 것은 세례자 요한부터 바리새인이 다 같았으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듣고 본 것을 믿고 따르는 것과 믿지 못하여 따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양상을 바꿨습니다. 캄캄한 날에서 건지신다는 말씀을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가는 길을 가릅니다.

6. 우리의 안과 밖을 오가고 서성이는 우리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인 우리는 믿음이 약합니다. 실상은 우리 안에 있는 양이기보다 우리 밖에서 헤매는 양입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모습은 우리 모습입니다. 캄캄한 세상 안에 갇혀 삽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고자 오신 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라도 은혜와 진리를 느끼고 이해하며 나눈다면 우리는 캄캄한 세계에서 견져내시겠지요. 그가 약속하셨으니까요. 그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니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어야 저희는 당신의 말씀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어야 저희는 눈을 뜨고 은혜와 진리를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이 되게 하소서.
캄캄한 세계에서 저희를 건져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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