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872   1/44

 내용보기

작성자


박영신

제목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본문 창세기 15: 6, 로마서 4: 1-3, 6: 15-18/찬송 19, 466, 495/교독 10 (시편 27편)


1. 첫머리: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데 ‘믿음’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의 핵심어입니다. 특별히, 개신교에서 그렇습니다. 알다시피 5백 년 전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때의 가톨릭교회가 어느 점에서 ‘성경 말씀’에 어그러지고 잘못 되었는지를 밝혔습니다. 이를 간파한 이상, 그들은 ‘말씀’에서 벗어나 ‘교황과 신부 중심’으로 움직이는 타락한 교회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 중심’의 교회로 바꿔놓아야 했습니다. 고해성사나 각종 미사를 베푸는 교회 의식에 참여하거나,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철저한 개혁을 추구한 교파에서는 이 모두가 한낱 미신에 지나지 않는 기만행위라고 했습니다. 개혁가들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신앙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 위에 서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첫걸음이자 밑바탕이고,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온 삶의 길 걸음과 같이합니다. 근본의 뜻에서 믿음은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한,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서 있는 한,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이 세상 안에서 사는 한, ‘믿음’은 곧 우리 삶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에 터하여 이 믿음의 문제 한 자락을 함께 살펴보면 합니다.


2. ‘믿음’에서 ‘의로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가 이 믿음의 기록물이고 이 믿음의 교과서입니다. 그 가운데 로마서가 돋보입니다. 믿음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서는 종교개혁의 길잡이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에 터하여 ‘믿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곧,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만이 인간을 의롭게 하고 ‘믿음’만이 성령을 불러오고, ‘믿음’에서 선한 행함도 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로마서의 몇 구절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가르침과,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개혁 신앙의 정신을 잘 요약해줍니다.

본문은 대화체로 쓰여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의 문제를 던지고 답하는 식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고 한 다음,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로마서 4: 2-3ㄱ). 바울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행실을 보고 ‘의롭다’고 여기셨다면 그가 자랑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랑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데는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의 세평이나 그의 됨됨이가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데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여러 모로 보아 남에게 뒤질 수 없는 출중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여기셨는지에 대하여 결론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에 기대어 답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앙 체험이나 느낌으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의 권위에 기대고자 했습니다. 성경 이외에 기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엇갈리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일러주는지, 함께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고 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고 물었습니다. 모는 것의 최종 판결은 성경에서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도 아니고 교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신학 교수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운 건국 조상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로마서 4: 16).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하시고,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다고 한 기록에 잇대어 풀이합니다(창세기 17: 2, 5).  

왜 그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까?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가 ‘믿음이 조상’입니까? 이에 대한 답이 구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창세기 15: 6). 본문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이야기를 더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태어나 하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아브라함과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곳 문화와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지역 문화의 지평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 역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 것도 알 까닭도 없었습니다. 그 지역의 문화 풍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지역 문화권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상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느닷없이 하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건네셨습니다. 그곳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희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는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기 12: 1-4ㄱ).

믿음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는 곧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습속과 지배에서 떨어져 나옴을 뜻하고 그 지배 체제와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예언자들을 연구한 어느 유대인 학자는, 이스라엘 역사는 두 가지 ‘거부 행위’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세 때 강대한 이집트의 문화와 정치 체제와 결별한 것이 그 하나고, 이보다 먼저 아브라함 때 강대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정치 체제와 결별한 것이 다른 하나라고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딴전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3. 행함의 삶:

유대인들이 아주 뽐내면서 예수께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요한 8: 39). 진정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것을 유대인 당신들도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떠벌리기만 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한 것처럼 행하지 않는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내세운다면 모름지기 아브라함의 후예답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뿐 행함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약 본문에서 읽었듯이,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창세기 15: 6).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고 여기신 그 한 순간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지 한 참 되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시고, 또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메소포타미아 문화 밑에서 받은 이름 곧,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아브람’ 대신에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7: 1ㄴ- 4, 15: 5ㄴ).

그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기에’ 그는 이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답게 줄기차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흠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기 위하여, 다른 말로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흠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기 때문에, 값없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답게 순종하는 삶, 모든 데 흠 없는 삶을 진실 되게 철저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둘러싼 논쟁과는 전혀 무관하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그 ‘믿음’의 힘을 받아 그렇게 살게 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루터가 일러주는 대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고,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모든 일에 적극이고, 적극으로 행동하고 적극으로 참여합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참된 뜻에서 기쁘게 합니다. 즐겁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문을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분이 우리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본 다음, 교인들이 많이 모여들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놓은 이유가 황당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십일조 연보를 강요하지 않으니’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연보에 인색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 교회가 십일조를 자기 교회에 바쳐야 의롭게 여기심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은 우리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선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람 교우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심 받은 믿음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늘 감사하면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바깥 여러 운동 단체에 적극 기여하고 있습니다. 즐겁게 연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자의 행함입니다.  


5. 끝머리: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름 받아 이 예람 공동체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마음 문 열고 서로 너그럽게 받아주고, 이해하고 경청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모든 근거를 성경에서 찾고자 합니다. 여러 가능한 풀이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틀릴 수 있고 맞을 수 있으나, 모두가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더욱 겸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실까?’ 늘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며, 흠 없이 살라’ 하신 간절하고도 준엄한 소리를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예민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는 빈 믿음’을 떠벌리는 것은 아닌지 언제나 깊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의에 순종하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서 6: 16-17).

믿음의 공동체로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기도>

심히 모자라는데도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답게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 더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ev
 포로들이 부르는 감사 노래
한문순 2020/11/22 255
Next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2020년 11월 15일)
김지은 2020/11/22 255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