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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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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2020년 11월 15일)
본문: 창세기 18: 16-32
찬송: 새8(거룩 거룩 거룩), 새536(죄짐에 눌린 사람은), 새393(오 신실하신 주)
교독문: 62(시편143)


1. 소돔과 고모라

  함께 읽은 말씀 구절에서 ‘그 사람들이’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에 개입합니다(18: 1-15). 뒤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개입합니다(19: 1-29).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한번 들어본 이들에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무서운 심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 초기의 이야기를 먼저 살피며 후대에 가서 정리를 많이 한 본문내용을 살펴 풍부한 연관성을 이해해보겠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범죄행위가 무엇인지 성경에서 나오는 바는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하는 알고자 하는 욕망이었습니다. 롯의 손님맞이에 소란스러움이 더해지면서 집단겁탈을 암시하는 말과 함께 고대사회에서는 신성했던 손님을 보호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보다 성경은 소돔의 죄는 사회정의가 깨어져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사야 1: 10.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표준새번역>

<에스겔 16: 49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표준새번역>
교만하여 양식이 많고, 가난한 자에게 무관심한 것을 죄로 보았습니다.

<창세기 19: 13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한글개역>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부르짖는 소리는 여호와 앞에 상달되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는 권리를 침해당한 자가 구원을 향해 지르는 소리입니다.

<예레미야 20: 8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으로 하면
<예레미야 20: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

폭력이다! 외치는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가닿았습니다. 곤궁한 처지에서 지르는 외침은 법적 공동체의 보호를 구합니다. 법적 공동체가 의롭게 그 외침을 듣지 못하면, 들어주지 않는 경우는 모든 법의 수호이신 하나님께로 전해집니다. 이 부르짖음이 소돔사회를 고발하고 그에 대한 선고가 나옵니다.

<창세기 19: 24-28절 주께서 하늘, 곧 주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소나기처럼 퍼부으셨다. 주께서는 그 두 성과, 성안에 사는 모든 사람과, 넓은 들과 땅에 심은 채소를 다 엎어 멸하셨다... 표준새번역>

유황과 불은 화산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경험에 기초한 묵시전통의 표상입니다. 이 고발과 심판은 응보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민간신앙에서 이 이해는 특별한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광범하게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의에도 관련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으로 응보의 세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이해에 대해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본문의 얘기를 하기 위함인데, 다시 심판의 얘기를 해도 질식할 거 같은 시간을 거칩니다. 어서 빨리 본문의 얘기로 들어가고 싶지만, 이 인식의 공간에서 고발과 심판 사이에 새어들어왔던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봅니다. 많은사람들이 현실구조 안에서 이 은총을 구하고 있습니다.

2. 비판적인 본문으로 보면

하나님이 개입하는 본문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을 성경 처음으로 밝히며, 그 목적은 후손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밝힙니다. 의와 공도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로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언서에서 선포되는 바 관계로서의 의로 사회정의를 행하며 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추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얘기가 나옵니다. 22절은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매우 오래된 사본에는 “야훼께서 아브라함 앞에 서 계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극진히 손님을 대접하고 배웅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이 붙잡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돔을 향하여 간 자리에서 한바탕 설전이 벌어집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소돔이 어떤 도시인지 살펴야 합니다. 소돔은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달리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도시가 아닙니다. 소돔은 배제되는 도시가 아니었고, 혈연과 연결되어 구원받아야 할 도시도 아닙니다. 소돔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해 감찰하는 인간공동체의 본보기, 실례, 곧 연대감 속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에서 물을 것은 소돔이 유죄인가 무죄인가, 불신앙적인가 의로운가입니다. 죄인은 특정한 범죄로 유죄를 받은 사람입니다. 의인은 무죄로 판결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던진 첫 질문은 그 내용을 알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 질문의 배후에는 다수의 죄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수의 무죄한 사람들이 있을 경우 의인과 죄인이 섞여 있을 때 판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생각입니다. 고대에 있어 이스라엘은 세상적 판결이나 신적 판결에 있어 집단적 책임의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 집단적 책임의 법은 개인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생활권 내(內) 범죄의 짐을 서로 지는 공동체의 뿌리 깊은 유대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도시공동체와 가정, 부족의 혈연적 결속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은 그 결속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성경은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창세기20: 9)라고 나와 내 나라의 운명이 묶여져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의 질문은 집단적 책임의 법을 빠져나오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소돔은 혈연적인 결속을 통해, 그리고 운명적으로 상호 종속(mutual subordination)의 관계에 있기로 여러 사람과 뜻을 모은 세계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 도시로부터 무죄한 자를 구출하거나, 보존하는데에 관심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소돔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맥락을 벗어나면 ‘무죄한 자를 죄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23절)’를 롯의 구원에만 관련하는 개인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질문한 의미는 “무엇에 의해서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결정됩니까? 다수의 악입니까 아니면 소수의 무죄입니까?” 이는 시대를 달리해서 계속해서 질문되어져 정리가 거듭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내용이 아니고, 고대의 집단적 사고 대신에 전혀 다른 새로운 집단적 사고를 수립하려는 시도입니다. 소수의 무죄한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살릴 정도로 소수의 무죄자들이 하나님에게 중요한지 묻습니다. 성서에서 의(義)는 행위의 완전성에 있지 않았고(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창15: 6) 의로운 행위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호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소돔과 관계하고 있는데 소돔의 대다수의 죄로 인해 소수의 무죄한 사람들까지 포함된 하나님과 소돔의 관계는 파괴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그 무죄한 자들 때문에 소돔을 용서함으로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붙잡고 자신을 먼지와 재라고 고백하는 고대인에게는 거의 보기 힘든 태도로 대담하게 얘기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있어서 그는 더욱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부담능력은 더 커져서 매우 소수의 무죄자들이 다수의 죄인보다 중요하며 심판을 유예할 수 있다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벌하는 의지보다는 구원의지가 더 크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얘기는 열 명의 무죄한 자에서 마쳐집니다. 이것이 얘기의 단절인지, 어떤 하나의 결론이 미루어진 것인지 본문에 의거해 생각을 정리하면 이것은 단절도 아니고, 미루어진 결론도 아니고 이 자체로 최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최종적인 것이며 아브라함은 그 이상을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죄의 책임을 이전시켜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죄를 속할 수 있는 믿음을 확보하였습니다. 롯은 이 아브라함의 대신 구하는 힘으로 구출하게 됩니다. 또한 이는 예수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이론적 정신입니다.

<이사야 53: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사야 53: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

<호세아 11: 8-9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멸하기 보다는, 그의 마음을 온통 ‘바꾸려’ 하십니다. 그는 거룩한 자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여기서 구원하는 의인, 의로운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K. Galling, 국제성서주석 재인용)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성경 처음 거론된 형태에서 본다면 나중 올 예수까지 연결됩니다. 마음을 바꾸려 하시고, 용서를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그렇다면 의로운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것은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에 하나님의 의가 의되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시려 하시고, 사람을 끝없이 용서하려 하시며, 죄의 책임을 감당하시려 하셨던 모습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거룩하신 모습이 아닌가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이는 나는 거룩한 자요, 너희를 구별하여 세웠으니 너희는 내 거룩한 백성이라 성경구절이 우리안에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니 저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와 공도의 길을 알면 갈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 길을 걸어간 예수님을 알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의를 하나도 알지 못하고, 따를 수 있는 힘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위시하며 사는 삶에서는 너무나 낯설고도 낯설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를 향해 언제나 팔 벌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십자가에서도 우리를 향해 팔 벌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를 향해서는 손 놓고, 예수님을 향하여 손잡는 이웃이 될 수 있게 성령님 늘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참고
독일성서공회판 성경
국제성서주석, 폰 라드
현대성서주석, 월터 브르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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