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872   1/44

 내용보기

작성자


이인미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mindfirst

제목


위로하라,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라 (2020년 11월 8일)
제목        위로하라,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라
찬송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411장 아 내 맘속에
성경        고린도후서1:6-7
교독        81. 에베소서 4장

1. 여는글

며칠 전 한 여성 코미디언이 삼십대 이른 나이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 여성을 잘 모릅니다. 코미디 프로그램 시청을 그닥 즐기지 않는 탓에, 화면으로 그녀를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막상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한 뒤 그녀에 관련된 글들을 찾아보며 발견한 단편적 내용들이, 제가 아는 지식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망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여러 미디어(official & social)에 올린 글들을 보면, 그녀가 웃음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해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비하나 타인조롱이 아닌 비교적 ‘착한’ 언어와 행동을 활용한 코미디언으로 기억되는 듯합니다.  

코로나19 대유행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힘들어합니다. 대면관계가 아직도 원활치 않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만난다고는 하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리 만남이 반가워도 손을 맞잡을 수 없습니다. 익명의 대중이 모이는 곳에는 출입명부가 필수로 작성되기에 개인정보가 어떻게 관리될지 우려스럽습니다. 대안으로 QR코드가 동원되는데 스마트폰이 없으면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체온의 오르내림에 예민해지고, 마스크 강박증 같은 것이 생겼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스크 착용을 했네 마네, 제대로 하지 않았네 하며, 때로 말다툼이나 우격다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더 깊은 우울에 빠진 사람, 예전보다 분노조절이 더 어려워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20대 여성의 경우 우울로 인한 자살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0% 이상 늘었다는 뉴스기사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확진자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가능한 한 서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금씩 애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비대면으로 인하여 훨씬 더 가혹한 작업환경 속에 놓이게 된 택배기사들의 연이은 과로사도 우리 마음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합니다.

생각할수록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위로(慰勞, comfort)’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을 뜻합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코로나19 이전에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물론 있었습니다만, 코로나19 창궐시대에는 뭔가 개인단위로 조절불가능한 공통된 괴로움, 힘겨움, 억울함 같은 것들로 인하여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사뭇 많아진 것같이 느껴집니다.

위로가 절실한 시대, 우리가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는 성서의 말씀을 몇 군데 살펴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타인을 위로할 때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2. 위로하기 & 위로받기

그런데, 인간은 위로하기보다 위로받기를 조금쯤은 더 선호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의 ‘평화의 기도’를 아는 선생님들이 여기 많이 계실 듯합니다. 성가대의 찬양곡으로도 작곡되어 더러 연주됩니다. 대부분의 기성교회에서는 설교 전에 성가대 찬양 순서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람교회는 성가대가 없긴 하지만, 오늘 성가대 찬양을 듣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동영상을 보며, 노랫말을 음미하면서, 같이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뒷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위로받기보다 위로하게 하소서(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be console” 하는 구절을 만납니다.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 프란체스코조차도 남을 위로하기보다 자기가 위로받기를 좀 더 쉽게 선택했었기에, 아마 저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그도 인간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깊은 존재론적 외로움과 슬픔을 공감하게 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위로하는 걸 실제로 더 즐거워하고 기쁘게 선택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을 잘 돌보고, 잘 위로하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자기가 위로함으로써 상대가 괜찮아지는 걸 기대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위로를 잘하는 분들도, 위로하다 오히려 좌절하게 되는 사례를 때때로 경험한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마음으로 상대를 위로하다 되레 상대와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자기가 위로받고 싶은 방식대로 남을 위로하면 안 된다는 조언도 유효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위로가 개인차가 굉장히 큰 까닭에,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새삼 인식하게 됩니다.  

3. 위로받기를 거부한 사람들

인간의 위로가 개인마다 차이가 커서 그럴 수 있고, 차라리 받지 않은 것보다 못한 위로도 있기 때문일 텐데,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게 위로받기를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기도 합니다. 성서에도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소개됩니다. 오죽하면 위로를 거부할까 싶은데, 그 대표적인 사람의 예가 예레미야서에 한 차례 나오고, 마태복음에서 다시 한 번 인용됩니다. 라헬(Rachel)입니다.

__[렘31:15; 마2:18]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라헬의 남편 야곱도 자기 아들 요셉이 들판에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는 다른 아들들의 거짓말을 듣고 절망감에 빠져, 위로받기를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__[창37:35] 야곱은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울었다.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하였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하면서 탄식하였다.

때로 강력한 어조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던 예언자 이사야도 위로를 한때 탐탁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또 전해도, 도대체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는 데에 지쳐서 그랬는지, 이 지경 속에서는 그 어떤 위로도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탄식한 바 있습니다(사57:6). 저의 설교문은 주로 표준새번역 성서를 직접인용하는데, 표준새번역은 이사야의 그 말을 “내가 어찌 기뻐하겠느냐”로 번역했습니다. 반면 개역개정번역은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로 옮겨, 예언자 이사야의 심경을 더 처절하게 표현해줍니다.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던 욥은 그들의 위로를 불신했습니다. 그는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욥21:2)”라고 외칩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위로를 불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의 말 또한 표준새번역과 개역개정번역에서 달리 나타납니다. 표준새번역은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입니다. 개역개정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예레미야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매우 깊은 슬픔,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상처입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위로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때로 위로가 소용없을 것 같다며 탄식하다가도, 예언자 이사야는,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사40:1)” 하는 하나님 말씀을 힘있게 선포합니다. 그는 메시아의 모습과 사역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는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61장 말씀입니다.  

__[사61:1-2; 눅4:18-19]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__[사66:13]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하나님)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만 이와 같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선포되어있는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서의 평지설교에서 예수님은 ‘위로’라는 주제를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풀어주십니다.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눅6: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요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지금 받고 있는 ‘너희의 위안(위로)’이란 무엇일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서의 산상설교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마5:4).”

사도 바울 역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적극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위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고 전제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사람들 사이에 계속 번져나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실제로 경험하였으며, 그것을 여러 편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서로 위로의 말을 주고받으라는 권면이 있습니다(살전4:18).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합니다(롬15:50).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언하는 사람이 곧 위로하는 사람임을 강조합니다(고전14:3). 고린도후서에서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연거푸 나오며,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자 받은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게 오갈 수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중 두 곳만 읽어보겠습니다.

__[고후1: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__[고후7:5-7]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의 육체는 조금도 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5. 닫는글

오늘 위로에 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여러 말씀들을 묵상하며,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암울한 코로나19시대, 또 그밖의 여러 이유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 또한 위로를 구할 때 나는 하나님께 위로를 구하고 또 받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있는가? 이 질문은 이제 다음과 같이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웃을 위로함으로써 이웃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잘 전달하는 사람인가? 혹시 지금 내가 남에게 핀잔을 주거나, 불만을 발설하거나, 비난을 일삼거나, 오해를 지속하면서,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기운을 전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론화되어 누구나 공감하는 명확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적극 위로하려 나서는 한편, 나의 언행에 직접 영향을 받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열정을 내지 않는 사람은 혹 아닌가? 이 시간 진지하게 예민하게,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자신 그리고 나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이웃의 상태를 섬세하게 살피면서, 자기자신을 성찰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여주심, 감사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적합하게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비록 부족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잘 받아, 그것을 또한 잘 전달하는 존재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주시옵소서. 인간인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이웃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이웃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존재로 살고 싶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더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ev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2020년 11월 15일)
김지은 2020/11/08 141
Next
 떠남과 머무름 (2020년 11월 1일)
편영수 2020/11/08 141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