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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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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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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있는 파수꾼 에스겔처럼, 푯대 향해 달려가는 바울처럼(2020년 10월 11일)
제목        책임감있는 파수꾼 에스겔처럼, 푯대 향해 달려가는 바울처럼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성경        에스겔 33:10-11, 빌립보서 3:12-14
교독        83. 빌립보서 4장

1. 여는글

오늘 설교는 성서의 등장인물이자 집필자로서 구약의 예언자 에스겔과 신약의 사도 바울을, 지금 눈앞에서 바라보듯 모셔오려 합니다. 두 사람은 구원을 선포하며, 구원받은 자로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에스겔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약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두 인류의 구원에 집중되어있습니다. 시대도 다르고 청중도 각각 달랐지만, 두 분의 구원선포는 믿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았습니다.

같은 점은 또 있습니다. 두 분은 (추정하기론) 서른 즈음에 환상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종교적 전통이나 율법을 중시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부르심받은 이후 ‘난 예전과 달라졌어!’라며, 말로 주장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부르심받은 그 목적을 따라 평생을 충실히 살아서, 타인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일했습니다. 두 분의 삶은 주님을 중심에 두고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었습니다. 두 분은 누가 뭐라 말하든, 남의 보는 눈이 있거나 없거나, 많거나 적거나, 깔보거나 우러르거나 간에, 오직 주님 앞에서(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 신앙인답게 살았습니다.

2. 책임감있는 파수꾼 에스겔

에스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청년 시기, 에스겔은 제사장으로 생활했습니다. 제사장은 예언자들보다 아무래도, 성전의례과 종교전통에 보다 더 깊이 결합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은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을 감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집중하여 성전 중심으로 그 신앙의 힘을 모아 온 백성을 충만케 하고, 그 신앙의 기반 위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하여 현실의 국력을 다지던 시기였습니다. 제사장 에스겔은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정책에 크게 감동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요시아 왕이 전쟁터에서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맙니다.

요시아 왕의 뒤를 이은 여호야긴 왕은 강대국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 앞에서도 무력하고 무익한 통치자였습니다. 결국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에스겔의 나이 서른 즈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침내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환상을 본 후, 예언활동을 시작합니다(겔1:1-3). 그는 제사장 경력을 지닌 예언자로서 권위있게 체계있게 예언활동을 수행합니다. 발터 아이히롯트(Walter Eichrodt, 1890-1978)가 쓴 주석서에는 에스겔이 예언의 책 에스겔서를, 집필뿐 아니라 직접 편집까지 했을 거라는 추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 에스겔서 33장은 파수꾼 비유에서 시작됩니다(1-6절). 하나님은 경계의 나팔을 제대로 불어야 할 책임이 파수꾼에게 있음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칼이 다가올 때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고 다른 사람이 나팔소리를 들었는데도 그가 나팔소리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합하게 행동하지 못해 죽었다면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 다른 사람이 나팔소리를 전연 듣지 못해 그가 죽게 되었다면 파수꾼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에스겔은 바로 그러한 파수꾼 역할에 적합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은 절망에 빠져 기진맥진,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팔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시대의 파수꾼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무기력해진 사람들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다그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셔서 자신을 제사장에서 예언자로 변화시켜주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책임감있게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 희망을 선포할 책임

다음으로 에스겔서 본문은 파수꾼의 비유에 대한 친절한 부연설명을 덧붙인 다음(겔33:7-9), 아래와 같은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너 사람아, 네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하여라. 의인이라고 해도 죄를 짓는 날에는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악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죄악에서 떠나 돌이키는 날에는 과거의 악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다고 하여라. 그러므로 의인도 범죄하는 날에는 과거에 의로웠다는 것 때문에 살 수는 없다(겔33:10-12).”

이는 “난 이제 틀렸어”라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 할지라도 돌이키면 과거의 악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크고작은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 좀 후회하다가 “난 이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이야”하면서 혹시 좌절하고 있는 악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하나님은 자포자기하려는 악인들에게 죽지 말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계속해서 ‘과거의 죄’뿐 아니라 ‘과거의 의’에도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성실히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현재 절망해있다면 그 절망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희망과 생명은 하나님을 믿을 때 생성되며, 하나님을 믿을 때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과거와 관련해, 이렇게 약속해주십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내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겔33:16).” 그런데 여기서, 에스겔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악행에서 떠나 지금부터 선행을 하며 살면 된다는 식으로 단순화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의 의미는, 인간의 의지로 선행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를 믿고 악한 일을 하면 (…) 그가 행한 모든 의로운 행위를 내가 전혀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33:13). 따라서, 에스겔 본문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악행을 그만두고 이제부터 선을 행하라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의를 믿는 것 자체를 경계하면서 그것이 악이기 때문에 그것에서부터 돌이키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 같은 선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 백성에게 경험케 하려는, 부르심받은 자로서 에스겔의 책임감있는 활동 안에 통합되어있습니다.

4. 속사람을 들여다보며 탄식하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의 구원선포 또한 에스겔의 구원선포 메시지에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분 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었고,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에 책임있게 성실하게 전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 중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어느 민족의 피를 받았든, 어느 나라에 호적을 두고 있든, 의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아주 동등하다고 강조합니다(롬3:9). 그 동등성 면에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르심을 받고, 인생을 돌이켜 복음전파에 전 생애를 걸고 ‘사도’로 활동하는 자기자신조차 예외로 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같이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롬7:22-24)”

우리가 잘 알듯,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다가 감옥에도 갇혔고, 매도 맞았고,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표현으로 하면,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던” 사람이었습니다(고후11:23-27).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에 ‘올인’했던 사람도 자신의 속사람을 들여다보며 저렇게 탄식하였습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제아무리 선행을 할지라도, 제아무리 부름심받아 개과천선했을지라도, 제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사도 바울은 매우 명확하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8:1).” 여기서 관건은 ‘나는 과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늘 존재하는 사람일까?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늘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룩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내와 끈기로 지속가능한 상태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금 분명히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의 의지로 오세요, 머무세요, 가세요,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 은혜의 방향은 그리스도의 소관입니다. 인간은 다만 불쌍히 여겨주십사 기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또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습니다(롬9:15-16).”

5. 닫는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 바울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사람, 불쌍히 여길 사람으로 선택받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기다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날마다 성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기다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 그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완성’되고 그 자리에서 ‘종료’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한 번 완성되었다고 해서,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최종적 완결상태에 도달한 것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사도 바울 또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시대 이 백성의 파수꾼으로 선택하셨다면 우리는 파수꾼으로 책임있게 살아야 합니다. 사제였다 예언자가 된 에스겔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희망을 선포하라 하셨을 때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있게 전파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가 가진 종교적 지식과 성실과 열심을 파수꾼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는 데에 총동원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면,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사로잡혔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니, 좇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표준새번역은 ‘목표점’이라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번역은 ‘푯대’라고 표현했습니다. ‘푯대’라는 단어가 약간 더 시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오늘 설교 제목에 ‘푯대’를 넣어보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책임감있게 파수꾼의 삶을 감당한 에스겔처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 바울처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답게 날마다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믿음 더하여주시옵소서. 혹시 지금 그리 살고 있지 못하다면 오늘이라도 얼른 또다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붙잡아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 약속해주셨으니, 참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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