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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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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
본문: 요한복음9:1~7
찬송: 새15장 하나님의 크신사랑, 새26장 구세주를 아는 이들, 새549장 내 주여 뜻대로
교독문: 새42번
제목: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  


1. 예수가 맹인을 만나다
2.
오늘은 맹인을 고치는 복음서 여러 구절 중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사건과 인자되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보려 합니다. 9장 전체를 읽으면 좋겠지만, 줌으로 만나는 상황을 감안하여 앞부분만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못보는 사람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맹인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그 사람인지, 부모인지를 묻습니다. 병이 생기는 이유가 죄이고, 그래서 부모의 죄, 태중에 있었을 때 지은 죄라도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그 사회의 법입니다. 그 사회의 법이나 이 사회에서도 병과 장애에 대해 부모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 부모나 그 사람이 죄가 많아서 라고 회자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나면서 눈멀게 된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다. 그는 ~하기 위해 나면서 실명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하십니다. 그 사람의 맹인으로 난 출생을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있게 말하십니다. 이는 세례받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 읽고 외웠던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장애와 어려움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보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장애와 어려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예수께서 계속하여,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낮이니, 보내신 이의 일,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낮과 밤이 있다는 얘기를 하시며 내가 내 인생을 사는 동안, 그리고 내가 지상에서 구원의 사명을 펴는 동안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말씀을 하시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쯤에서 소경이 구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고치셨을까 질문으로 찾아본 결합본문에서 바디매오는 예수께 소리질러 구했고 말씀으로만 고치십니다(막10: 46~52).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께서 반죽하고, 바르는 노동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니다. 맹인은 말씀을 따랐고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떠지지 않았던 눈을 떴습니다.

2. 눈 뜬 사람을 심문하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자, 눈을 뜬 감동은 한 줄도 기록되지 않고, 그의 이웃들과 그의 걸인이었던 모습을 본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다, 아니다에 눈 뜬 사람이 내가 그로라 말하여도 그 사건을 두고 일어난 소란은 잠재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바리새인에게 가서 판단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제야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신 일은 안식일에 반죽하고 바르는 노동이라는 겁니다 .안식일에 노동이란 그 날을 거룩한 사람들이 범해서는 안되는 십계명을 어긴 죄였습니다. 이스라엘로 짧은 방문에서, 평일에는 유대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다가 안식일이 되면 노동을 피하기위해 저녁에 켜야하는 침실의 불은 모조리 켜져있고,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서면 안식일법을 지키는 전혀 다른 사회라는 걸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은 재판장에서 해결을 봐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뜬 얘기를 들었어도, 판단내릴 수 없기는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았다, 다른 한편은 죄인이 어떻게 표적을 행하냐,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안식일법을 범했는지 판결을 받으러 온 그에 대해 그들이 확실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 눈뜬 사람에게 예수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건 바리새인집단이 권위없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눈뜬 이는 선지자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은 맹인을 눈뜨게 할 기적을 베풀 선지자라면 당연히 안식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자신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느랴 매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율법의 문자를 중시하여 죄는 어떤 것이다 세세하게 규정합니다. 그것을 지키면 거룩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은 매우 간단한 문제로 만들어 놓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들이 죄를 범했는지 안범했는지의 판단내리는 자가 되는 문제도 생깁니다.  

혼란을 더해가며 재판의 증인으로 그의 부모가 등장합니다. 그 부모의 입에서도 아들이 눈 뜬 감동은 한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그 사람이 소경이었다는 걸 믿지 않고 그의 아들이 맹인으로 났다는 것과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확인합니다. 그 부모는 우리 아들이고, 맹인이었다 증언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모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준비된 말만 합니다. 부모가 경직된 말만 하는 이유는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에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교는 당시에 비공식과 공식으로 하는 것이 있고 체벌이 추가되기도하고, 30일 회당출입금지에서 그 정도에서 변화를 갖지 못하면 60일, 가족외에는 유대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는 완전금지령도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 긴시간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어쩌면 사회경제활동도 할 수 없는 출교를 두려워하는 부모는 아들의 감격스런 치유에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눈뜬 사람을 통해 예수를 심문하다

그들은 맹인이 되었던 자를 두 번째 불러들입니다. 분열된 바리새인들은 그들안에 다른 목소리를 잠재웠습니다. 잠재워진 목소리는 그 재판정에서 오래된, 혹은 젊은 사람들이었는지, 소수파였는지, 다수파였는지, 약자였는지, 약자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이제 하나의 목소리만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가 죄인인줄 안다며 진실을 인정해라 종용합니다. 맹인은 예수의 죄는 알지못하나 지금 아는 것은 현재 맹인에서 눈을 떠서 본다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분열에서 사라진 목소리의 측면에서 죄인이 표적을 행할 수 없다 발언합니다. 맹인이 눈을 떠서 보는 것, 그리고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가 죄를 범한 것이라는 두가지 사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그들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율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재판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다시 예수가 무엇하였으며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는지 처음 질문을 세 번째 되풀이합니다. 처음 질문이 반복되는, 압박받는-내가 뭘 잘못했나- 분위기에도 눈 뜬 사람은 “그런데 왜 말할 때 안듣고 다시 들으려고 하냐,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하십니까는 질문을 해나갑니다. 이 질문은 판세를 거칠게 바꾸어 놓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욕을 퍼부으며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줄은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합니다. 이구절에서 사용한 ‘그 사람’은 ‘그 자식’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 말입니다. 맹인으로 구걸하던 사람이 눈을 뜨고 보니, 공회에서 재판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고, 바로 판단할 줄 알았는데 눈 뜬 사람들, 바리새인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조차도 어찌 판단해야할지 전혀 못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예수가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하나님이 죄인은 듣지 않으시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아는데, 세상에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결론하여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눈뜨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올바른 신학으로 반박합니다.  
재판은 결의된대로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중간정도 혹은 그 이상의 출교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4. 예수를 통해 유대인을 심문하다

혹시 오늘 사회를 보시는 한제선 선생님이 35절부터 41절까지 읽어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 9: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요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가 살펴본 불법적인 눈뜬 사람과 예수의 심문과 판결대로 눈 뜬 사람은 추방되었습니다. 그동안 재판의 후면에 있었던 예수는 눈 뜬 사람을 찾아와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고 합니다. 예수는 구원자와 온 세상의 통치자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인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해 죽으실 분이시고, 심판자로서 온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인자”라는 칭호는 맹인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구원자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불의에 대한 심판자로 사용됩니다. 눈뜬 사람은 인자로 예수의 정체성을 소개받고 그를 믿습니다. 눈 뜬 사람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절), 선지자(17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33절)에서 그가 누구시오 내가 믿고자 합니다(36절)  계속해서 입장의 변화, 진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났다, 재창조 혹은 변화를 거듭했다, 성장했다라는 표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두 번째 재판을 엽니다. 두 번째 재판은 전혀 다른 배경입니다. 이 재판의 판사(judge)는 하나님(God)이시며 유대인들을 고소한 사람(accuser)은 예수님이고, 피고(accused)는 첫 번째 재판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을 배심원으로 불러 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합니다. 예수는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합니다. 그렇다고 보던 사람들이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심판의 의미를 새겨 줍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 눈을 감아버림으로 맹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예수를 알고도 그들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므로 죄인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먼 것보다 휠씬 심각하므로 치유하기 더 어려운 눈 먼 상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도 맹인입니까?” 맹인이 맹인인걸 인정했다면 죄가 없지만, 보지못하고도 본다고 하는 죄가 있습니다.
몸의 장애, 어려움은 예수께서 고치기도 하시고,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로 믿고, 따르기에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문자로 따져 정하는 율법에 매여 있으면 참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주님안에서 맹인이었던 우리의 모습에 감사합니다.
맹인이었던 우리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빛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빛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을 볼 때 두려움에 싸이지 않게 보호하시고
우리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과 솔직한 교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삶이 연결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의 장애, 어려움 모두 주님께 내어놓고 맘껏 주님의 길 갈 수 있게 동행하실 것을 믿사오며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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