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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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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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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2020년 9월 6일)
제목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찬송        219장 주 하나님의 사랑은/ 207장 귀하신 주님 계신 곳/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성경        요한복음 4:20-24
교독        49. 시편 108편

1. 여는글

점차 잦아들 것이라 예상했던 코로나19가, 지난 달 광화문집회 이후 급격히 재확산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물론 그 전부터도 조짐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개신교 교회들의 예배, 정확히 말하면 대면예배, 오프라인 예배가 대중의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개신교 교회의 대면예배가 웃음거리를 넘어, 심지어 혐오대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에 대하여 개신교회들은 참으로 딱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느냐, 라는 물음에 대하여 신앙적 대답도, 합리적 언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헌데 사실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들을 위한 온라인 예배는, 고가의 방송장비를 갖춘 교회들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벌써 부분으로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영상예배라서 사실 일방적 송출 방식이었습니다만 지금도 온라인 예배를 그렇게 드리는 교회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영상예배를 포함한 온라인 예배는 마치 예배가 아니라는 듯, 한국 개신교회는 발끈하고 있습니다. ‘종교탄압’이라는 다소 방어적인, 아니 공격적인 용어까지 써가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한국 개신교회’란, 한국의 전체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말한다기보다는 현재 개신교회의 정책을 입안하고 지지하며 최종결정하는 종교기득권층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한국 개신교회 대표를 ‘자처’하는 이들을 일컫습니다. 물론!! 그들의 대표성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전연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아주 많습니다.

오늘 설교는 ‘예배의 참모습’을 주제로 합니다. 온라인 예배는 예배냐, 예배가 아니냐, 그런 첨예한 이슈를 두고 찬반으로 갈라서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예배의 참모습이란 무엇인지, 말씀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침 기원후 1세기,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이 주제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내용이 요한복음서에 녹취록처럼 남아있습니다.  

2. 어디에서 예배를: 이 산? 예루살렘?
  
요한복음서 4장 전반부는 사마리아 지방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예수님이 홀로 들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는 주로 혼혈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강대국이 쳐들어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자기들의 땅에서 추방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100% 다 끌려갔던 건 아니고, 그 땅에 잔존하는 유대인들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새로 이주해 들어온 이방민족 사람들과 통혼하며 그곳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 거주민들은 종교적으로도 유대인들과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구약성서 전체를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는 데 반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다섯 책들을 ‘사마리아5경’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단 혹은 타종교인, 비유대인 취급하며,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곳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결혼을 여러 번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되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무슨 사고가 났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녀가 사고를 쳐서 여러 차례 쫓겨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대로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산다 주장하겠지만, 남편이 다섯이나 됐던 이 여성의 경우, 정말로 평탄치 않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달라 하는 것을 조금 낯설어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적대적 관계를 염두에 둔 태도입니다. 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거니는 것에 대하여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초지종을 여쭙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요4:27). 왜 놀랐으면서도, 여쭙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 지점에 대하여 침묵하므로, 추론을 통한 말씀 읽기 활동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대목입니다. 때로 성서는 성서의 전체 메시지를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인간이 적극적으로 추론해야 하는 부분들을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거리낌없이 사마리아 여인과 오랫동안 대화하셨습니다. 물 이야기를 거쳐, ‘남편’이라는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사마리아 여인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예수님 앞에 새로운 주제를 꺼냅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3. 어떻게 예배를: 아는 분을 예배하여라

사마리아 여인이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4:20).” 여기서 ‘이 산’이란 그리심(Gerizim) 산을 말합니다. 그리심 산은 ‘야곱의 우물(요4:6)’ 인근에 있는 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온(Zion) 산을 성소로 여겼습니다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을 성소로 추앙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무엇으로 보느냐와 하나님 계신 곳을 어디로 생각하느냐에서 확연히 갈렸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그와 같은 도전적 말건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요4: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는, 장소가 딱히 정해져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어디 특정한 장소나 건물에 고정적으로 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계신 곳이라며 특정한 건물을 지목해 하나님의 집, 성전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행7:48]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행17: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4. 어디에서 예배를: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나님의 집, 성전, 성소가 따로 있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예배당도 별도로 꼭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시편 27:8).”

이때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장소를 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나님 계시는 ‘장소’가 아니라, 그러니까 성전이나 성소같이 별도로 지정된 곳으로 급히 이동하지 않고, 그는 하나님께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그냥 각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안 보이는데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예배드릴 때 모이는 공간 자체가 애초에 불필요한가? 갑자기 그런 의문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도 그 말씀을 계속해서 듣기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답이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요4:22).”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두 지점을 짚어가며, 그 뜻을 새겨보기로 하겠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그 뜻을 새깁니다만, 예람 선생님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또 독자적으로 그 뜻을 새길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첫째는, 우리도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자칫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대로 알고, 예배드려야 할 분을 예배하는지, 혼자서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둔하고 맹하며, 때로 멍청합니다. 매주일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급기야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 일당(?)이 예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시비를 걸어볼 것까지도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 또한 가끔 습관적으로 찬송가를 펴서 습관적으로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마음 깊이 노랫말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때가 뜻밖에도 많습니다. 옆사람이 찬송가 음정을 자꾸 틀리면 웃음 혹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흘려 듣거나, 내게 이롭도록 비틀어 듣거나, 너무 고차원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한다며 고깝게 듣거나, 아주 엉뚱하게 그 뜻을 새기기도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게 아니라면, 혼자서 매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찌 보면 위태로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박해가 한창이었던 로마 제정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카타콤을 활용(?)해,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기독교인들의 크고작은 비밀스런 예배모임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원칙적으로 모여서 드려야 합니다.

둘째,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난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마치 유대인 우월주의를 표상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신학자(C. K. Barrett)는 이렇게 주석을 붙여두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로부터 퍼져나간다는 뜻”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오히려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을 경계하십니다. 구원이 유대인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번져나간다는 현상을 짚어주신 것입니다. 헬라어 성서는 “유대인에서부터”라고 기록해두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구원의 기원이나 근원이 아니고(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순서로서 다만 앞에 놓인다는 해석을 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먼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징적 의미로 본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여타의 사람들에 비해볼 때 먼저 구원받은 우리가 바로 ‘유대인’일 수 있습니다.  

5. 어떻게 예배를: 영과 진리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계속해서 또 보겠습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4:23-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영’은 인간의 정신, 마음, 혼령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헬라어 성서는 ‘프뉴마(성령)’로 명확히 지시합니다. 이 프뉴마는, 인간을 지으신 후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받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리고 진리 또한 인간들이 곳곳에서 저마다 옳다 주장하는 의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를 뜻합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그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이런저런 다른 것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잘 없습니다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가대가 박자와 음정을 잘 맞춰 노래하는지에 꽤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또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배시간 동안 그늘 없는 땡볕에 주차해놓은 자기 차의 안녕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를 동반한 예절바른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면 어떡하나 염려하며 예민하게 아이를 감시합니다. 교회 안에서 연애하는 커플들은 교회가 데이트장소 중 한 곳이 되어서,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내내 마음을 쓰며 예배를 드립니다. 모두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를 놓쳤습니다. 예배당 안에 아무리 점잖게 앉아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주의집중은 자주 흩어집니다.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 그 생각을 더 하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 졸음이 오기도 합니다. 잠깐 눈을 감는 것 정도쯤이야 생각하다가, 아예 잠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왔다, 앉았다 일어섰다, 노래했다, 성가대 찬양과 설교를 들었다, 암송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연보를 드렸다, 그러다가 예배가 끝나는 경우도 제법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자가 받아들이고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생명의 기원이신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께서 여기가 어디든 여기에 임재하시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일 것입니다.  

6. 닫는글

우리는 오늘도 ‘줌’ 프로그램을 통하여, 온라인에서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각자 몸으로는 자신의 집에 앉아있지만, 마음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인 곳이 “이 산”이든 “예루살렘”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줌’이든, 어디든, 사실 예배의 공간으로서 딱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물론 크고 좋은 건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일 수 있는 잇점은 있습니다.)

가능한 자리에서, 가능한 시간대에, 가능한 사람들이, 가능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한데 모여있을 때,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실 때, 바로 그곳이 예배당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어떨지 모르나, 코로나19 ‘덕분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해외동포들과 함께 모일 수 있는 예배당이 ‘지금, 여기’에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어려운 이때,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주소지가 있는 특정한 장소여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온라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들이 지금 서로 접속하고 또 마주치고 있습니다. 서로의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동시에 함께 기다리며, 하나님께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며, 감사가 넉넉히 있는 역사적 사건이며,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예배입니다. 기
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배드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 우리를 모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격합니다. 우리가 “이 산”이 어딘지 따지거나, “예루살렘”을 찾아다니거나 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 그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 반짝이는 십자가 높이 세운 커다란 예배당이 아니라 어둡고 은밀한 카타콤일지라도 그곳을 예배공간으로 활용했듯이, 우리가 ‘온/오프’ 상관없이 예배공간을 만들어서, 모이는 데 힘쓸 수 있도록, 이 시간 우리 영혼 하나하나를 붙잡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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