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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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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영수

제목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2020년 8월 30일)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본문: 누가복음서 13:31~35
찬송:  11장(거룩한 주님께), 73장(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478장(주 날개 및 내가 편안히 쉬네)
교독문: 7번(시편 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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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몇몇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에서 떠나라(눅 13:31)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선의로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 사회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말이었을까요? 헤롯도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적대하는 동맹에 가담합니다. 헤롯은 한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눅 9:9),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로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43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형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법을 어긴 결혼을 한 것으로,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의 참수형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경고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계속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순교를 예언자의 사명으로 생각하셨습니다(눅 13:33). 예수님은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선지자들이 흘린 피” (마 23:35)로 물들은 순교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해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헤롯의 통치 지역을 떠나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따르기를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용기 있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눅13:32)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계속하실 생각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간계를 꿰뚫어보십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자신의 땅에서 쫓아내고 싶어 합니다. 헤롯이 두려웠던 것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예수님의 ‘힘’이 자신의 ‘힘’보다 센 것을 알고 ‘여우’ 헤롯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 유감입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헛수고였다는 것이 유감일 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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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거부했던 예루살렘에 대해 예수님은 깊이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성읍이며, 하나님의 성읍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과 시온 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기”(눅 12:48) 때문에 예루살렘의 책임은 특별히 큽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에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 (눅 13:34) 예루살렘의 죄는 한층 무겁습니다. 옛날에도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경고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은 예언자의 말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스가랴를 언급하셨습니다. 스가랴는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되어,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하나님이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님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고, 드디어 왕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성전 뜰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대하 24:19~2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고발한 것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예언자들의 이러한 운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자신을 예언자로 여기셨고 예언자들의 운명에서 자신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마 23:34~36).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예수님에게는 아직도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 날이라는 사역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만 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장소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이전에 누구도 예수님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수난의 시간을 정해주셔야 비로소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은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수난의 사흘째 되는 날에 ‘목표’에, 즉 부활의 목표에 도달하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눅 9:22)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즉 예수님은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수난도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분입니다. 심지어 수난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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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십니다. 암탉은 제 새끼를 맹금 혹은 그 밖의 적수들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품에 품습니다. 주님은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예루살렘을 보호하십니다. 감싸 주고 건져 주며, 다치지 않게 뛰어넘어서, 예루살렘을 살리십니다(사 31:5).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에서 예루살렘을 보호하려 하실까요?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받지 않게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면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서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고, 다른 신들을 쫓아가서 그것들을 섬기며 경배했습니다(렘 13: 10).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품 안에 안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눅 13:34).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부름이 무위로 돌아감을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해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복음에 귀를 닫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바빌론 포로 시대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는 무겁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파괴됐고 텅 비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추방됐고 끌려갔습니다. 성전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는 심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우리의 삶은 예루살렘처럼 ‘텅 빈’ 삶, 황폐화된 삶이 될 것이고,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예루살렘이 폐허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게 주셨던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을 철회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롬 11:29). 이스라엘에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의 눈이 멀고, 귀가 먼 시간은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 깊습니다(롬 11:32~33).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다시 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눅 13:35) 이것은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우리를 예외 없이 부르십니다. 우리는 모두 초청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딤전 2:4). 우리에게는 언제나 돌아가서 안길 수 있는 예수님의 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께 돌아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날개 그늘에 숨겨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겠습니다.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시는 주님은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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