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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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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말씀'으로 '분별'을
본문 레위기 18: 1-4; 로마서 12: 2/찬송 52, 517, 521/교독 42 (마태복음 5장)


1. 광화문 단상의 ‘본회퍼’

한 주 전 8월 15일, 강탈국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된 지 75돌이 되는 광복절 날이었습니다. 대규모 군중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코로나에 대한 엄중한 경고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익은 한 ‘목사’가 그날도 단상에 올라서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는 모습이 티브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눈을 끄는 화면에 사로잡혔습니다. “‘[...]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본회퍼(Dietr[...]”라는 글귀였습니다.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고 한 독일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이, 단상에 달아둔 배경 막에 적혀있었습니다.

이 글귀는 아래와 같은 본회퍼의 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미친 운전자가 옆에 서 있는 무고한 한 무리의 사람들 속으로 질주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파국을 지켜보다가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망자들을 매장하는 일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친 자의 손에서 운전대를 빼앗아야 합니다.” 미친 자는 나치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어 총통의 자리에 앉은 히틀러를 뜻했습니다. 말씀을 새기고 기도하는 가운데 본회퍼가 내린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본회퍼는 히틀러에 맞선 저항자였습니다. 무엇보다 나치 정권이 내세운 인종주의, 순혈주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무자비한 탄압을 받게 된 힘없는 ‘이웃’ 유대인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때 독일 교회는 나치 정권을 비판하기보다는 비호했습니다. 본회퍼는 이 ‘국가 교회’의 노선에 동의할 수 없어 이탈한 ‘고백 교회’라는 작은 교회 연합회 쪽에 섰습니다. 이들 교회의 신앙 노선을 지키고자 하여 세운 지하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억압 밑에서 ‘고백 교회’는 수난을 받았습니다. 신학교도 한산해졌습니다. 강의실이 텅 비는 처지기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친 히틀러’에 대하여 소리 내지 않을 때, 교회조차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본회퍼는 정권을 향하여, 이 정권에 빌붙어 지내는 교회를 향하여 발언했던 목사였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제거코자 한 모의에 가담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체포됐습니다. 두해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바로 한 달 전에 반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습니다.

본회퍼가 말했다는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라는 그 글귀가 광화문에서 열린 군중집회의 단상에 걸린 배경 막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자료를 더 찾아보았습니다. 이 말은 올해 처음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부터 집회를 주도하는 쪽에서 써 오고 있었습니다. 현 정권의 운전자인 대통령이 ‘미친 운전자’라고 보고 그의 손에서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는 탄핵의 요구와 주장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미친 운전자 히틀러는 오늘의 우리나라 대통령이고, 운전대를 잡은 미친 자를 끌어내고자 한 본회퍼는 단상에 오른 자(들)라고 이해한 듯합니다. 단상 앞에 모인 군중은 이 배경 막을 친 단상에 올라선 목사에게 열광하고, 어쩌면 그와 함께 죽음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결연한 순교의 뜻도 다지는 듯합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2. 말씀의 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잘 아는, 저 역시 자주자주 새기고 새겨볼 수밖에 없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을 따라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따라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사는 식으로 그렇게 살고자 하고, 돈 있는 자들이 사는 식으로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따라 그들이 ‘잘 산다’고 하는 것을 우리도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들이 ‘못 산다’고 하는 것을 우리도 ‘못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합니다. 알고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삶을 본보기로 삼습니다. 삶의 목표, 가치, 방식, 취향을 본받아 모두가 한통속이 됩니다. 이 세상 이상 다른 것은 없다고 믿고 이 세상의 기준을 홀랑 받아버립니다. 이 세상을 본받고자 합니다. 본받고자 하여 미쳐 날뛰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런데, 본문은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기준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 것에 묶여 살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여기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새롭게’ 되고 어떻게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을 본으로 삼아 세상에 들붙어 사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새롭게’ 변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찌들대로 찌든 우리 인간이, 자기를 ‘새롭게’ 한다면 얼마나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이상 다른 것이 없다고 믿고 세상을 고스란히 본받아 사는 인간이 ‘변화’를 이룬다면 얼마나 ‘변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인간입니다. 별수 없는 인간이고 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갇히고 이 세상에 묶여 사는 이 인간이, 뭐 어떤 ‘새로운 것’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이 세상이고 아는 것이 이 세상뿐인데, 무슨 도리로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새롭게’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이 세상의 틀 안에서 궁리를 짜낼 뿐이고, 이 세상의 벽 안에서 뱅글뱅글 돌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은 인간 스스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새것’이란, 기껏 옛 초가집에서 새 기와집으로 옮겨 살고, 지난날의 마차에서 오늘날의 자동차로 갈아타는 것이 고작입니다. 대단히 ‘새로운 것’ 같고 대단한 ‘변화’인 것 같지만 그 모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탐욕, 이기심, 고집, 편견, 편협, 오만, 독선, 거짓과 같은 더럽고 추잡한 것들이 뒤범벅이 된 도가니 안에서 이리저리 맴돌 뿐입니다.

인간의 힘에 기대어서는 근본에서 ‘새롭게’ 될 수도 ‘변화’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 밖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데,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고 어떻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일찍이 이 점을 밝혀둔 구약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이집트 땅을 떠나 홍해 건너 저 편 새로운 세상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땅에 죽치고는 그곳 풍속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땅의 품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집트 땅에서 들붙어 꾸역꾸역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가나안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똑똑하다고 해도,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었다면 그들은 내내 이집트라는 세상을 ‘본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했을 것이며 ‘변화’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분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그의 ‘규례’로, 그의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변화를 받습니다. 제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제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영리하고 재능이 있다고 하는 것조차 세상 본받는 일에서만 그러할 뿐입니다.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과는 전혀 무관한 영리함이고 재능입니다. 이 ‘분별’의 능력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 밖에서 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광화문의 군중집회를 이끄는 세력이 내건 주장은, 자유 민주주의 밑에서 제도로 자리를 잡은 정당 정치권과 시민 운동권에서 논의되었고 계속 논의되고 있는 내용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주장에는 유권자의 판단을 받기 위하여 내놓았던 ‘선거 공약’도 들어있고, 후보자들이 함께 토론했던 항목도 들어있습니다. ‘한미동맹’이니 ‘소득주도성장’이니 ‘원전폐기’니 ‘주사파’니 하는 항목이 보기입니다. 시민이 함께 자유롭게 논쟁하고 논쟁할 할 수 있는 항목을 두고, 나치에 저항하다 교수형을 당한 본회퍼를 끌어들여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말을 배경 막에 건 작태는 가당찮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행동을 얼토당토않게 본회퍼와 동일화하여 과대히 떠벌리면서 자기를 순교자의 지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자기 맹신과 자기 교만으로 점철된 과대망상증의 짓거리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순교’라는 말을 넓게 쓸 수 있습니다. ‘믿는바’에 따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공산주의를 위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여성의 권리를 위하여, 흑인 해방을 위하여 싸우다 죽은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순교의 원형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원형입니다. 그가 가신 길을 뒤따르다가, 그를 증거 하다가 죽은 자를 ‘순교자’라 일컫습니다. 본회퍼는 이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내몰림 받는 힘없는 ‘이웃’ 편에 서셨던 주님처럼, 주님의 제자로 살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도 나치 독일에서 억압받고 핍박받는 힘없는 ‘이웃’ 편에 서야 했습니다. 어떤 정당도, 시민 단체도, 교회도 이들 편에 서려고 하지 않던 무정하고 잔혹한 시대였습니다. 베를린 시내 한 복판에서 언제이고 군중집회를 열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릴 수 없던, 엄혹한 나치 체제 밑에서였습니다. 국회도, 시민운동 단체도, 재판소도, 교회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본회퍼는 고통 받는 ‘이웃’을 살리기 위하여 미친 운전자의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택했던 길은 외로운 골고다 길이었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이었고 '말씀'의 길이었습니다. 본회퍼가 ‘순교자’의 반열에 들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에 있을 것입니다.  


4. 맺으며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떠벌리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춥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함부로 ‘순교’라는 말을 끌어들여 이를 데 없이 헤프게 느슨히 쓰지 않습니다. ‘말씀’에 터하여 사는 사람은 ‘말씀’의 빛으로 ‘세상’의 허상과 ‘인간’의 허영을 가려냅니다. ‘말씀’의 힘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교회에 속한 교인으로 겸허하게 ‘말씀’에 마음 문 열고, 함께 ‘말씀’을 새기어 자기를 살피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까닭도 ‘분별’하고자 함입니다.


<기도>

갈피조차 잡기 어려운
이 혼란한 광장의 시대에
‘말씀’으로,
‘오직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늘의 은총을 더해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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