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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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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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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2020년 2월 9일)
제목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찬송       327장 주님 주실 화평/ 565장 예수께로 가면/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성경      사무엘상6:10-16,  야고보서 1:12-17
교독      10. 시편 16편


줄임글

사무엘서가 보고하는 ‘벧세메스(Beth-she’mesh)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두 어미소’ 이야기와, 야보고서가 강조하는 ‘시험 또는 유혹의 진짜 출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들여다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도 신약의 하나님 이미지도 ‘시험’에 연결되어서는 안 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세상의 삶과 다른 삶을 알게 되었기에 이 세상에서 어차피, 자주, 시험을 당합니다. 유혹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시험에 실패하고, 유혹에 패배했을 때 ‘하나님’ 운운하며 변명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시험당하는 것, 유혹당하는 것, 즉 똑바로 못 가고 왼쪽으로 치우치거나 오른쪽로 벗어나는 것은,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미소처럼 복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어미소처럼 복종하는 일이, 나의 특성이나 나의 욕심이나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서, 복종하는 내내 혹시 울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1. 여는말    

올해 초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온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시끄럽습니다. 치사율이 무려 21%였던 2015년 메르스에 비교해볼 때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치사율은 훨씬 낮다고 보고됩니다. 그럼에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식으로, 이 ‘미지’의 감염증에 대하여 사람들은 방심하지 않고, 민감하게 관찰하고, 철저하게 잘 대응하는 중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만, 간혹 중국인 혐오, 나아가 동양인 혐오 같은 과잉반응 부작용도 나타나, 걱정스럽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메르스 참사 때보다 현 한국정부가 비교적 체계있게, 이 어마어마한 감염사태를 주시하며 관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직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가만 보면, 인류는 이 지구 위에서 꽤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아주 허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지진, 화산, 홍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가 주는 시련 앞에서 인간은 번번이 속수무책이 됩니다. 여기에 테러나 전쟁, 사고 같은 인공의 재난도 인간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돈, 권력, 출세, 쾌락 같은 유혹 앞에서 인간은 형편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 설교는, 시련이나 유혹에 패배할 때 흔히 기독교인들이 둘러대는 몇몇 자기합리화와 변명이 내포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궤변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련을 주셨어” 또는 “나는 하나님의 시험을 받고 있어” 같은 말입니다. 다음은, 선악과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를 예시하면서 내뱉는 망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그러게 애초에 인간을 지으실 때 유혹에 약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었어야지.” 이 같은 말들은 시련이나 유혹을 견디고 이기는 데에 실패한 자기 문제를 슬그머니 은폐하고, 그에 대하여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책임을 회피하며, 시련과 유혹이 끌어들인 불행한 결과와 부정적 영향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서가 보고하는 ‘벧세메스(Beth-she’mesh)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두 어미소’ 이야기와, 야보고서가 강조하는 ‘시험 또는 유혹의 진짜 출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 그 이끄심에 대한 올바른 복종, 철저한 순종을 배우고자 합니다. 더하여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와 신약의 하나님 이미지가 어느 지점에서 연속되고 통합되는지,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약1:13)

먼저 야고보서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도 당대에 이런 말이 돌아다녔던 모양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어.” 여기서 시험은 유혹의 다른 표현인데, 유혹에 벌써 넘어갔거나, 유혹을 견디기 어렵다고 징징거리는 사람들의 변명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경험 속에서 자기의 약함을 깨닫고 진단하며 분석하는 것까지는 잘 되었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결론으로 나아간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의 모든 선택과 갈등의 책임을 물으며 핑계를 대는 것은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이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에 품고 지내는 기독교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시험, 다른 말로 유혹에 관한 위와 같은 생각 앞에서 야고보는 신정론을 전개합니다. 신정론(theodicy)이란 신학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어도 다 배우지 못할 만큼 범위가 넓고 내용이 많으나, 요약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옳다”를 전개하는 신학이론을 가리킵니다. 야고보서 1장 본문은, 야고보서 신정론의 알맹이라 불리울 만합니다. 야고보는 우선 하나님이 시험, 유혹의 근원이 되신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거부합니다. 야고보는 1장 13절에서 권고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겪는 시험들, 즉 유혹들의 진짜 출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욕심입니다. 야고보는 14절에서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막7:15-16).”

야고보서 신정론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는 ‘욕심’을 거론합니다. 그 욕심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100% 무기력하게 욕심에 맡겨져있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은 인간의 ‘자아’ 자체를 대신하거나 대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인간의 자아를 사로잡고 있지도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인간의 자아와, 말하자면 마주서있습니다. 욕심은 자아와 관계를 맺고자 시도합니다. 자아가 욕심의 시도 즉 서로 관계 맺는 것에 동의해서, 욕심과 관계를 맺으면, 욕심은 죄를 잉태하여, 죄를 출산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죄는 죽음을 또 잉태하게 되고, 마침내 죽음을 낳습니다.

1장 16절, 17절에서 야고보는 강력히 경고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야고보는 여기서, 착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시험, 유혹, 시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것이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은 방심하는 순간 금방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0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10:13).” 이 구절을 대할 때 ‘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시련을 주신다’는 뜻이로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시련 겪는 것을 다만 허락하실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시련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또, 우화같이 쓰여져있는 욥기 1장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욥을 시험한 것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을 한 번 시험해보라고 하나님께 거듭거듭 조르고 요청하는 자는 바로 사탄입니다.

3.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삼상6:12)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시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대로 믿음 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려 할 때가 아주아주 많으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때때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예컨대,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인 엘리야 예언자에게 하나님은 반응해주셨습니다(왕상18:1-46). 또 사사 입다가 전쟁을 앞두고 ‘내기’하듯 하나님께 서원하자, 하나님은 그걸 굳이 말리지 않으시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셨습니다(삿11:30-40). 마치 사탄이 욥을 시험해보겠다고 떼쓰듯 조를 때 허락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무엘상 6장 본문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야훼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훼의 궤(the ark of the Lord)를 둘러싼 시험입니다. 여기서 야훼의 궤란,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이 열심히 찾아다니던 그 ‘성궤’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신비스러운 상자를 가리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상자에 야훼 하나님께서 임하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보시고, 호응해주셨습니다. 그 상자에 강림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상자를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약탈해, 가져갔습니다. 그때부터 블레셋에 재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야훼의 궤가 야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에게, 야훼의 궤를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생겼습니다. ‘야훼의 궤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블레셋 사람들은 고민했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사제들과 점술가들이 나타나, 제안합니다.

“이제 새로 수레를 하나 만들고, 아직 멍에를 메어본 일이 없는 어미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 그런 다음에, 주님의 궤를 가져다가 그 수레에 싣고, 여러분이 궤를 가져온 허물을 벗으려면, 속건제물로 보내는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작은 상자에 모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 소 두 마리가 가고 싶은 대로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두고 보다가, 그 소가 그 궤가 본래 있던 지역인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이렇게 큰 재앙은 그분이 직접 우리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소가 다른 곳으로 가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연히 그런 재앙을 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삼상6:7-9).”

어미소의 모성을 활용, 아니 악용해 시험을 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내용과 방식은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험에 동의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도 이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시험해봐야만 알 수 있겠다는 인간의 낮은 수준에 하나님께서 맞춰주신 것입니다. 먼저 어미소 두 마리가 발탁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미소 두 마리를 수레에 붙들어맸습니다. 두 어미소의 송아지들은 우리 안에 갇혀있습니다. 사람들은 야훼의 궤를 수레에 실었습니다. 쥐(mice) 모양, 종양세포(tumors) 모양을 따서 만든 금제품들을 넣은 작은 상자도 수레에 같이 실었습니다. 이윽고 어미소 두 마리가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미소 두 마리가 과연 어디로 향하는지 예의주시했습니다. 어미소 두 마리는 벧세메스 쪽으로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갔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두 마리 어미소를 계속 이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랐기에 어미소 두 마리는 자기들 안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모성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어미소들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벧세메스로 똑바로 가는 동안 내내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이를 짐작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울부짖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야훼의 궤를 실은 수레가 벧세메스를 향해 움직입니다. 어미소와 아기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계속 울려퍼집니다. 울지 않으면서 복종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잔인한 말, 누가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4. 닫는말

우리는 성서를 따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악마적인 것들과 전연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날씨 변하듯 변하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을 예비하고 계십니다(1:17). 여기서 좋은 선물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와! 좋은 선물이다!’ 동의하고 환호할 수 있는 종류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좋은 선물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벧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간 어미소들처럼, 하나님께 복종해야만 합니다. 어미소들은 송아지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송아지들한테 달려가는 것이 어미소들에게 더 좋고 행복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제들과 점술가들이 시험하고 있는 줄 모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해 그 시험을 시작하진 않으셨으나 그 시험에 개입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미소들을 꽉 붙잡아, 벧세메스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어미소들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복종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라고 시작한 시험, 가고 싶다는 유혹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미소들은 그 시험을 견뎌냈고 결국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견뎌내게 하셨고, 이겨내게 하셨습니다. 어미소들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게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어미소들은 죽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삼상6:14).  

우리도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세상의 삶과 다른 삶을 알게 되었기에 이 세상에서 어차피, 자주, 시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시험에 실패하고, 유혹에 패배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시험하시는 거다’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비신앙적 변명은 마음 속에 품지도 말고 입 밖으로 내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험당하는 것, 유혹당하는 것, 즉 똑바로 못 가고 왼쪽으로 치우치거나 오른쪽로 벗어나는 것은,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미소처럼 복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어미소처럼 복종하는 일이, 나의 특성이나 나의 욕심이나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서, 복종하는 내내 혹시 울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나의 욕심 때문에 내가 겪는 시험, 유혹을 하나님 주신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우리 믿음에 분별력을 더하여주시옵소서. 벧세메스를 향하여 똑바로 걷도록 어미소들을 이끄신 하나님, 오늘 여기 모인 우리 예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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