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823   1/42

 내용보기

작성자


한문순

제목


하나님은 아신다 (11월 24일)
사탄의 의심은 욥을 고난으로 몰고 간다.사탄은 욥의 믿음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 자체와 욥의 목숨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면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땅의 사람들은 그런 진실을 알 길이 없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절규하며 하나님께 질문한다.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기존의 신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들은 고난 당하는 욥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욥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눈 앞에 보이는 욥의 상황을 같이 고민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정답을 반복하기만 한다. 하나님과 논쟁하고 싶고 직접 그 말씀을 듣고 싶었던 욥 앞에 마침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을 욥은 직접 만나게 된다. 주어진 고난을 해석하는 욥의 이해는 달라졌다. 하나님은 욥에게 죄가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하던 욥의 친구들에게는 분노하시고 욥에게는 이전의 삶을 회복시켜주셨다. 욥에게 진실로 죄가 없었으며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아신다

오늘은 욥기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감사절에 욥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어울리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고난 받은 욥을 통해 어쩌면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엿보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 받는 이와 동행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제가 고난 받는다고 여기던 분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도 넉넉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계셔서 좀 어리둥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욥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배우는 것, 알려주시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읽었으니 욥기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욥기는 이야기할 것도 돌아볼 것도 많은 책이었습니다. 욥은 사람이름입니다. 욥기는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욥은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실존인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욥기를 두고 문학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욥’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내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은 이 천 년 전 기록인데다 기록되기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수집한 것인지라 쓰인 언어의 출처와 저자, 쓰인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개 욥의 이름은 샘족계 이름으로 추정을 하고 있고 욥의 이름을 ‘내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라고 풀이하는 데  대다수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는 듯합니다. 이름이 암시하듯 욥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는 자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던 욥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던지게 되는 심각한 실존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욥기를 모르시거나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욥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의인이었습니다.

욥1:8에서 하나님은 욥을 두고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내 종 욥이라고 표현하시는데요, 거기서 말하는 내 종이란 표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이는 자리에 사탄이 끼어듭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지요. 바로 이 대화에서 욥의 고통은 비롯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 욥을 사탄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욥이 의인으로 사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에게 집과 소유로 큰 보상을 주니 그것이 울타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받은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긴다는 말이죠. 사탄은 신앙을 일종의 거래로 보는 셈입니다. 욥의 신앙이 순수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탄이란 이름에 담긴 뜻은 ‘대적자’, ‘고발하는 자’입니다만 그 이름답게 사탄은 욥에 대적하여 그의 동기를 의심합니다. 사탄은 그의 선한 동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에게서 모든 소유를 빼앗으면 그는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며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도로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사탄에게 욥의 소유를 알아서 하도록 권한을 넘기십니다. 그러나 제한을 두시지요. 욥의 소유에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요. 이런 사실을 땅에 사는 욥과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땅에 사는 이들이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초월의 세계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인간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그 알길 없는 진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며 살고 있을까요?

사탄은 제안했던 대로 욥의 것을 빼앗습니다. 욥의 일꾼들이 약탈을 당해 죽고 나귀들도 빼앗기고 벼락에도 당합니다. 마침내 욥의 자녀와 형제까지도 모두 죽음에 이릅니다. 슬픔에  빠진 욥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땅에 엎드려 말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땅에 사는 욥에게는 영문 모르는 갑작스런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태도는 욥이 하나님께 받은 것 때문에, 풍부한 소유물 때문에 욥이 의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르시길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사탄은 여기서 의심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뼈와 살을 쳐보라며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가혹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을 이번에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한을 두십니다.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고요.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와 곧 욥을 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습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는 고통에 빠집니다. 구약시대에 이런 피부병에 걸린 자들은 공동체가 모여 사는 성에서 쫓겨나곤 했습니다. 욥기를 읽어가다 보면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욥은 자신이 어울리던 이웃들과 자신에게 도움을 받던 이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로 전락했거든요. 구약 시대에는 그런 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간주하여 특별한 정결과정을 요구했습니다. 죄의 정도에 따라 성에서 더 먼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광야는 일종에 버림받은 이들이 모여드는 곳, 쓰레기 처리장쯤으로 여겨졌지요. 욥에게 갑자기 닥친 몸의 고통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사회적 위기마저 불러왔고 정신적 고통까지 가중되기에 이릅니다. 옆에서 욥의 고통을 지켜보던 아내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여전히 신실함을 굳게 지킬 것이냐고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요(2:9). 그의 고통이 너무 가혹해 보여 그랬을지, 아니면 정말 신앙이 헛되다고 여겼을지, 아내의 진심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두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욥이란 사람은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내는 알았던 것이지요. 뒤에서 욥 친구들 이야기를 하겠지만 욥의 친구들은 욥의 무죄함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내는 그의 무죄함을 알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정작 욥의 무죄함을 아는 아내는 욥에게 사탄과 같은ㅁ ㅁ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고난을 주는 신은, 그에 대한 믿음은 필요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내의 말에 욥은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2:10) 욥에게 고난 여부는 신앙의 조건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신앙입니다.

욥의 고통은 계속되고 이를 알게 된 친구 셋이 먼 곳에서 찾아옵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이 너무 처참해 보여 목놓아 웁니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일주일을 보냅니다. 욥을 사랑하는 친구들이라 욥을 애처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고통에 사로잡힌 욥은 절규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게 따지고 묻기 시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더욱 괴로워합니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죽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를 들은 친구들은 그때부터 욥과 대적을 하게 됩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고요. 욥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세상사를 인과응보에 입각해서만 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영을 누리는 삶은 믿음이 좋아 하나님께 상을 받은 것이고 고통을 당하는 삶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말합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며 자신에 대한 의심도 없이 철석 같이 믿습니다. 욥이 겪는 고통은 그가 저지른 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욥이 죄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주고 증언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었지만 친구들은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적어도 자신이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은 하나님을 내세워 그를 죄인으로만 몰아세웁니다. 욥에게 친구들의 태도는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얼핏보면 죄 지은 바 없는 흠 없는 사람, 온전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욥에게 죄를 묻는 친구들 자리에 서는 건 욥처럼 억울한 자리에 서는 일보다 오히려 더 자주 일이나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죄의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지만 욥기를 따라가면 욥을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하시니 사람이 하나님을 틀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욥기가 쓰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욥이란 인물 설정을 이해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욥기가 겨냥하는 목표가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 있으니까요. 죄와 무관한 고통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죄 짓지 않은 자의 극심한 고통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는지, 그리고 고통에 빠진 이웃과 어떻게 동행해야 하며 특히 무고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데 욥기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욥기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욥은 죄 없는 자로 설정되어야만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24장에서 욥이 악한 자들은 잘 살아가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이들은 비참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보면 죄 없는 자의 범위는 욥처럼 온전한 자를 넘어 더 다양하게 포함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월호 피해자들이나 전쟁 희생자 역시 그들의 죄 때문에 재난을 당한 것이라 보기 어렵듯이 말입니다.

의인 욥은 고난을 몸소 겪으며 무고한 자들의 억울함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자가 되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이들의 절규가 자기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을 죄인으로 몰고가는 친구들을 향해서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뻔히 보이는 부조리를 그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말하니까요. 그리고는 같은 주장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마니까요. 그들은 무고하다는 욥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듣고 욥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한 채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기존에 들었던 대로, 기존에 정답이라 간주하던 대로, 자신이 알던 대로 돌아가며 되풀이하기만 할 뿐입니다. 친구들은 기존의 신학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욥의 상황을 같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낡은 이해를 내세우고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욥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말이지요. 인과응보라는 낡은 이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새롭게 답을 구하는 욥의 질문을 친구들은 허락조차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알던 바와 다른 이야기, 다른 문제제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세 친구는 과거의 욥을 반영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 받는 욥은 과거의 욥과는 다른 욥이 되었습니다. 어제의 욥과는 다른 욥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달라진 욥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들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욥기에서 말하는 바가 인과응보의 원리가 모두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이사야를 읽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부패한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인과응보에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의 고통이 욥의 경우와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내게 닥친 고통을 두고 욥처럼 내게 원인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제각각 다 다르게 죄인이듯이 고통의 원인 또한 다 달라서 자기에게서 비롯된 고통만이 아니라 자기와 무관하게 죄 없이 고통을 겪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점을 욥기에서는 부각시킵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면합니다. 욥기가 쓰여진 시기의 기성 신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사태입니다.

인과응보의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되지 않는 고난을 욥은 어떻게 이해해야 했을까요? 욥이 질문을 포기하여 자기 진실을 외면한 채로 친구들의 설명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죄 없는 자들의 고통은 영원히 누명을 벗지 못한 채 억울하게 묻히게 되는 게 아닐까요? 세상은 계속 억울한 고통에 침묵하다 결국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떠나가지 않을까요? 한편 아내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렸다면 또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사탄의 말처럼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겠지요? 보상이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인간이란 하나님이 계셔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욥은 총 42장으로 된 이야기입니다. 1장에서 2장까지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2장 뒷부분에서부터 친구들이 등장하여 3장에서부터 37장에 이르기까지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 논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38장부터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지, 내게는 죄가 없다며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상황을 같이 논쟁해 보자고 욥이 하나님께 줄기차게 촉구한 대로 하나님이 욥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을 욥은 직접 만나 뵙게 된 것입니다. 욥은 마침내 자기 생각과 논리로 모두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그저 받아들이게 됩니다. 죄가 없어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으며 신앙이 인간적 기대에 인간적 정의에 따른 보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묻던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 들입니다.

상당수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그 이전에 기대하던 왕국도 없고 번영도 없는 그야말로 보상 없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믿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욥기가 쓰였다고도 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 이야기가 욥기와 이어지고 욥이 흠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에게 나타나셔서 누가 정당했는지를 가려주셨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들은 욥처럼 정당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욥을 죄인으로 몰았던 친구들에게는 분노하셨고 욥에게는 그 정당함을 인정하여 그의 무고함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욥을 중재자로 내세워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크게 벌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친구들은 하나님의 명을 따랐다는 표현 외에 다른 반응이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요? 자신들이 철석 같이 주장하며 잘난 척 하던 이야기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를 떠났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대로 욥을 통해 기도를 드렸다고 하니 친구들 역시 마음을 돌이켰던 것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벌이 두려워 그저 행위만 했을 뿐일까요?

우리는 질문하는 자인가요 아니면 질문을 외면하는 자인가요? 우리는 있는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자인가요 아니면 내 생각에 갇혀 있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억지부리는 자인가요? 우리는 이웃의 고통의 소리를 제대로 귀기울여 듣는 자인가요 아니면 귀 막고 자기 말만 하는 자인가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려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자인가요 아니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아도 나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꿋꿋하게 펼쳐나가는 사람인가요?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금세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인가요 아니면 좋은 것을 받았듯이 어려움도 받는다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같이 누리는 자인가요? 욥기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걸어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고통 받는 자의 이웃이 되기도 하고 고통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상대로 고통 받는 자의 이웃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주신 형상대로 고통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은 보살피십니다. 하지만 너무도 연약하고 얄팍해서 쉽게 원망하고 쉽게 말하며 하나님이 저희에게 주신 형상에 등돌리며 자기 목소리도 외면하고 이웃의 목소리도 차단해 버리곤 합니다. 절규하는 욥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주셨듯이 아둔한 저희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하나님 뜻에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갖을 수 있도록 하나님, 저희를 보살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rev
 하갈의 경멸, 사라의 구박, 아브라함의 회피, 그리고 야훼의 사랑 (2019년 12월 1일)
이인미 2019/12/01 46
Next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2019년 11월 17일)
편영수 2019/12/01 46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