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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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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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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떠하든지 살아라! 그리고 평안하여라! (2019년 11월 10일)
줄임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했을 때 예레미야는 민족해방운동을 만류합니다. 민족을 배반하며 바벨론에 붙으려는 친바벨론파여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인 바벨론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소망(욕구) 사이에서 내적 긴장감을 느꼈지만, 예레미야는 아주 심각하게 그 긴장감 가운데 울고 또 울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국가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개인 한 명 한 명 하나님을 찾으면 기꺼이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을, 예레미야를 통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 뜻에 관하여 예레미야처럼 철저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다짐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가운데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내적 긴장감을 겪으며 또한 이겨나가는 것 말입니다.






제목       어떠하든지 살아라! 그리고 평안하여라!  
찬송       560장 예수께로 가면/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성경       예레미야 29:4-7
교독       80. 고린도후서 4장

머리말
이스라엘이 바벨론(바빌로니아)에게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처참하게 멸망당해, 바야흐로 커다란 불행 속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렘29:4-7]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한 판국입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야욕을 분석하며 분노 및 애통하는 어조로 쓴 논설)’ 같은 통곡을 해도 모자랄 듯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나라를 멸망시킨 사람들 틈에 들어가서 태연하게 삶을 유지하라 명령하십니다. 게다가 그곳의 평안과 번영을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야속하기 짝이 없는 말씀같이 들립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에 넣어주신 저 말씀을 차분히 새겨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일까지는 혹시 아닐지라도, 우리는, 사는 동안 결코 원한 적 없었던 불행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목하 구직활동 5개월째에 들어섰건만 번번이 낙방하고 있습니다. 실업급여 마감기한이 점점 다가옵니다. 불안합니다. 또 우리 중 누군가는 원하지 않은 다툼에 휘말리고, 원하지 않은 통증에 시달리고, 원하지 않은 질병에 걸려있기도 합니다. 불운이나 불행 가운데 놓여있을 때 우리는 대개, 거의 반사적으로, 불운이 우리에게서 맥을 못 추고 물러나기를, 또 이 불행한 상황이 행복으로 진전되기를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토록 약한 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불운 혹은 불행의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계시되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다는 일 자체가 인간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도착해있으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차분히 읽으며,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희망을 품을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예레미야의 긴장
먼저 예언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들을 적극적 사회참여를 실천한 사람들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부패한 사회에 항거하며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긴 했으나,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 정도로 간단히 이해될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를 ‘영적으로 민감하며, 신비롭고 경건한 종교인’으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예언자들은 종교적 영역에서 주로 활동하며 고매한 도덕을 소유한 ‘종교계 대표자’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에 대해 내렸던 평가를 중요하게 참작하여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자(使者, messenger )’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확고한 소명의식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1인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나 야훼(여호와) 하나님은…”하고 예언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칭한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자각 때문에, 그들은 평생 강한 내적 긴장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발설한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하자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말, 상처에 소금 뿌리는 말을 발설하고 싶지는 않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니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예레미야가 강한 내적 긴장감을 무릅쓰고 발설한 그 예언의 말씀이 나오기까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대 세계가 대격동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조그마한 나라, 그마저도 분단된 나라(남유다, 북이스라엘)에게 하루하루는 말 그대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무렵, 즉 기원전 627년부터 기원전 587년을 전후로 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예레미야는 예언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레미야는 므낫세라는 왕의 통치 말기 남유다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 왕은 남유다의 열네 번째 왕입니다. 그는 55년간 남유다를 통치했습니다(기원전 696-642년). 므낫세 왕은 최초로 앗시리아(앗수르)에 유다를 갖다바친 할아버지 아하스를 따랐습니다.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가 시도했던 좋은 정책들을 완전히 뒤집고, 부정하며, 배반했습니다.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요즘 식으로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군주였습니다. 강대국 앗시리아에 굴복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추구하는 조직적 반란을 두 번 계획했었습니다. 허나 국력이 워낙 약한 터여서,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히스기야 왕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셔서 생명을 연장해주시기까지 했습니다(왕하20:1-7). 그러나 결국 히스기야 왕은 죽었고, 그 뒤를 므낫세가 이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온갖 이교적인 제의관례들이 유다 땅에 다시 등장하도록 방치했습니다. 선대 왕이 금지했던 종교적 매춘행위마저 허용했습니다(왕하23:4-7, 습1:4-5).

예레미야의 분석
악한 므낫세 왕의 사후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무렵 강대국 앗시리아 안에 쇠퇴의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내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 때 유다는, 말하자면 독립전쟁 같은 것을 치열하게 치르지 않고서도 요행히 독립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일제 식민지에서 자동으로(?) 해방된 우리나라처럼 말입니다. 독립국가의 군주로서 요시야 왕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기원전 622년)부터 종교개혁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개혁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치세기간 동안 어떠한 외세도 그의 정책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우선 형식적인 것, 제도적인 면을 바꾸는 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아무래도 내면보다는 외모를 바꾸기가 쉽고, 성과도 금방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으로, 겉에 드러나있었던 여러 종교적 문제들이 정돈되어갔습니다. 유익하고 의미있는 변화였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 장면들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었고, 공중도덕과 공의로운 행정이 상당히 향상되었습니다. 이 같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신명기신학 즉 율법서에 근거해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을 복구하는 도중에 발견된 율법서 사본이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한다면 영원히 지켜주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였습니다. 그때 당시 백성들은 왕의 개혁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또 당대의 성직자들이나 예언자들은 영원한 성전, 영원한 다윗왕조를 야훼 하나님께서 보증하셨다고 자신만만하게 선포했습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매우 의미있게 평가합니다만(왕하23:23-25),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종교개혁을 통해 진정한 내면적 참회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제의가 거행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비판했습니다(렘6:16-21). 물론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 개혁세력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때로 그들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종교개혁을 통해 경직될 만큼 굳건해진, 백성들의 낙관적 전망이나 종교인들의 자기만족적 선포는 다가올 참사에 무력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잘 되는 것’ 그리고 ‘행복한 것’을 보장하는 신념에 매여있는 신앙의 얄팍함을 꿰뚫어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비판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 여호야김이 왕위에 올랐는데, 예레미야는 그를 경멸해 마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김은 부친 요시야의 개혁을 지속하려는 시늉만 보였을 뿐 실상 열심히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느꼈습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세력을 확장하자,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나섰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국가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바벨론의 봉신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기회를 노리다가 바벨론에 항거하는 폭동을 일으킵니다(왕하24:1). 앞 다르고 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치명적 실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 왕을 죽였습니다. 이후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을 비롯해 왕족과 신하들, 장군들, 숙련된 기술공들을 뽑아, 그들이 유다 땅에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추방령을 내려 내쫓아버렸습니다. 이로써 유다는 현명한 지도자들을 대거 잃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도 잃었습니다. 유다 땅에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귀족들이 주로 남아있게 되었고, 여호야김의 뒤를 이을 아들(여호야긴)이 추방된 고로 시드기야가 섭정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시드기야는 전반적으로 극단적 민족주의자들과 뜻을 같이했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위에 있던 때, 기원전 594년 혹은 593년경 바벨론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추방당해 유다로 돌아올 수 없었던 몇몇 유다인들이 몇몇 예언자들의 희망에 찬 약속을 믿고 그 폭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그 폭동을 신속히 진압했습니다. 유다의 반란세력들은 바벨론의 속박을 하나님께서 깨뜨려주실 것이라고 대중을 선전선동했습니다. 유다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민족주의자들을 반대했습니다. 몇 년이 더 흘러 기원전 589년, 유다는 애국적 열정의 물결을 타고, 하나님이 후원해줄 것이라는 확신 하에 또다시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그때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반란자들 편에 섰습니다. 이집트가 출동하면 바벨론이 물러가리라, 시드기야 왕은 희망을 품었습니다만, 곧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이집트의 군사활동을 저지한 것입니다. 마침내 느부갓네살이 유다 땅 예루살렘을 완전히 차지합니다.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유다 땅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고, 유다 땅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그 전쟁터에서 하릴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건물들도 파괴되었습니다.

꼬리말: 예레미야의 확신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반란세력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친바벨론파처럼 보입니다. 나중에 바벨론 사람들조차 예레미야를 자기들의 측근으로 여겼을 정도였습니다(렘40:1-6). 하지만 예레미야는 친바벨론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도구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심판도구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알려진 민족종교로서 하나님신앙은 당당히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국가적 위기, 국가적 재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신앙적 근거를 덧댄 낙관적 전망이었습니다. 당대 나름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은 다윗왕조가 영원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선민으로 잘난 체하는 얄팍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좋겠지” 싶은 헛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또한 얄팍할지언정 헛된 희망을 품곤 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인데 설마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잘못되게 하시겠어?”하는 얄팍한 자부심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원하지 않았던 재난에 휘말리게 되자, 낙관적 전망과 얄팍한 자부심에 기반한 배타적 선민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금방 하나님께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됐습니다. 다윗 계열 왕조가 영원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셔놓고 왜 이러시는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의 독특한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메시지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나타난 하나님은 ‘국가의 존망’을 의미있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국가가 멸망했을지라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이때까지 모든 백성이 자동으로 속하게 되었던 민족공동체, 제의공동체! 하나님은 이제 그런 건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개별 개인들의 신앙심과 내면적 결단을 바탕에 둔 신앙공동체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 내적이고도 충실한 ‘인격적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비록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일망정 열심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면, 성전과 제의 같은 것 없이도 얼마든지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을, 예레미야를 통해 보증해주셨습니다(렘29:10-14). 이제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의식, 역사적 정치적 배경, 신앙을 생각하며 이 말씀을 차분히 마음에 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렘29:4-7]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그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희망을 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어떤 불행한 상황이 올지라도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희망을 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희망을 품을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얕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깊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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