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1002   1/51

 내용보기

작성자


박영신

제목


세상 사람의 자유, 믿는 사람의 자유
본문 여호수아 24: 14-15, 고린도전서 10: 23-24, 31/교독 9 (시편 23편)/찬송 45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227 (저 하늘나라는),  351 (날 대속하신 예수께)


1. 머리에: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마음대로 말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별별 글을 다 적어 내달고 별별 소리를 다 내지릅니다. 다른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던 분의 말처럼 ‘우리나라와 같이 광고를 많이 내건 나라가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상가와 길거리는 현란하고 요란합니다. 어디이건 자기의 주장을 내다 걸고 선전합니다. 3.1절인데도 자기 집에 버젓이 일본 깃대를 내 달 수도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이 같은 반 학생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는 언어 폭언도 “일상적인 표현”이라고 하고 교장은 이런 것쯤이야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를 제재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유에 대한 규제는 떨쳐내야 할 악이라고 합니다. 우파는 우파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늘 극과 극으로 대치하다가도 이 ‘자유‘에 대해서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식으로 풀이하는 ‘자유’를 내세웁니다. ‘자유 시대’의 풍경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2. 자유의 문제:

인간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대등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습니다.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절대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라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2: 16-17).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을 수도 있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을 넘었습니다. 성경에서 배우는 인간의 ‘타락’입니다(창세기 3). 죄지음입니다. 그들 식으로 자유를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들은 하나님을 피했고, 서로를 탓했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에덴 동산을 떠난 다음, 인간은 줄곧 세상 식으로 자유를 이해하고 이용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익히 알다시피, 고대 이집트의 바로 체제 밑에서 살던 히브리인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억압에서 풀려났습니다. 자유를 찾았습니다. 소중한 자유였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이 자유를 자기 멋대로 썼습니다.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광야 길에서 이들은 별의별 주장을 뱉어내고 별의별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지난날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국이 생각난다며 돌아가자고 소리 질렀는가 하면, 그럴듯해 보이는 금 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예배하자고도 했습니다. 언행이 마구잡이였습니다.

이것이 자유라면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날뛰는 그들의 자유는 옳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앞에, 공동체 앞에 모두 책임 있게 자유를 행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법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으로 모세는 자유를 다스렸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무렇게 설쳐 대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떠맡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할 삶의 미덕으로 바르게 다듬어져야 했습니다.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에게 이어 놓아야 할 공동체의 기틀과 바탕에 대하여 또다시 일러줍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섬겼던 거짓 신들을 거부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택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택해야 할 길이었습니다.


3. 자유의 지향:

신약의 본문으로 삼은 고린도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지난날의 모든 관습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이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유가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자기 독선과 자기 무지 때문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언행이 공동체에 ‘유익’한지, ‘덕’을 세우는지를 늘 새기고 살펴야 합니다. 자유의 행사가 ‘유익’하지도 않고 ‘덕’을 세우지도 않는다면 이를 고쳐 바로잡아야 합니다. 상처 입히고 상처 받지 않도록 늘 말과 행동을 추슬러야 합니다. 이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목소리 큰 자들의 자유 행사에 가리어 좀처럼 볼 수 없게 된 작은 자들의 유익을 찾아야 합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품성을 본받아 남을 섬겨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러한 ‘적극의 자유’를 실행합니다.  

이처럼 말씀이 일러주는 자유는 자유의 행사자인 인간을 절대화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인은 주님이고 주님이 자기의 주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이끌지 않고 주님이 자기를 이끄신다고 믿고, 자기를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독문에서 함께 읽었듯이,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하고 고백합니다. 이 믿음은 자기 부정 위에 터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목자 되시는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서 우리는 순순히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를 따라 걷습니다.


4. 하나님의 자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마음가짐이 가볍고 몸가짐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대학에 들기까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자기 성장의 주요 단계에서 좁고 얕게 입시 준비하며 점수 따는 공부벌레로 자랐을 터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은 전혀 중히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소통과 공감의 삶을 제대로 체험해본 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해졌겠습니까? ‘입시 공부 잘했다’는 학생일수록,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일수록 더 그럴 것입니다.

이들의 말투와 행동거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고 얼마나 고집스럽게 행동합니까? 가벼움과 단호함과 고집스러움은 하나입니다. 가벼우니 단호하고 단호하니 고집스럽습니다. 고집스러운 사람, 단호하기 이를 데 없고 경솔하기 짝이 없습니다. 학생들만 그렇겠습니까? 학생 시절을 겪은 나이 든 선생도 그러합니다. 학생과 선생 가릴 것 없이 모두 경박하고 단호하고 고집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그럴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이렇게 찌들었습니다. 됨됨이가 모자라고 성품이 비뚤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기 능력과 판단에 따라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그 자유는 오죽 천박하겠습니까? 얼마나 저급하고 얼마나 치사한 자유일 것이며,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얼빠진 자유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은 이 자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규제 설정은 철폐되어야 할 자유의 적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무엇보다 앞세우고 자기 능력과 판단을 무엇보다 치켜세웁니다. '근대인'의 오만입니다. 이 인간이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신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신을 몰아냅니다. 그 신의 자리에 자기를 들여놓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섬기며 자기를 받들고 자기를 찬양합니다.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 자기의 연약함과 잘못함을 살피지 않습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시편 8: 5ㄱ) 고귀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자기 절대화로 치닫고 자기 신격화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자기 ‘우상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시대와 맞섭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자기 우상’을 타파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그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여 그를 따릅니다. ‘나’(자기)를 섬기지 않고 주님을 섬깁니다. 그를 받들고 그를 따릅니다.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제자로 삽니다.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 있게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두 길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세상의 자유’가 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리는 자유, 주님을 섬기며 받드는 ‘말씀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 성질에 따라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가 있고, 주님의 품성을 드러내어 자기를 제어하는 ‘주님 뜻대로’의 자유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자유는 세상 사람의 자유와 다릅니다. 믿는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하늘의 자유, 곧 말씀에서 일러주는 고결한 자유를 그립니다.


5. 맺으며:

지난 설날 주일 ‘갈라디아서 연속 설교’에서 익혔듯이, 자유인이 된 이 삶의 기회를 귀히 써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데]” 써야 합니다(갈라디아 5:13).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를 따르는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달리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되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만 챙기는 욕심꾸러기로 살아서는 안 되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로, 우리의 이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6: 19ㄴ).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하고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로마서 1: 1ㄱ).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해하고 행사하는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와 달리, 공동체에 선을 베푸는 “유익한” 자유, “덕을 세우는” 자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성품을 닮아 주님의 성품을 뿜어내는 자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대로 소리 지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과 당파의 이익을 넘어서서 공동체에 덕을 세우고 널리 이웃을 살피는 자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에 이어 함께 부를 찬송가는 되풀이해 부를 후렴으로 “나 구주 위해 살리라”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속 좁은 자기중심성에서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넘어 주님을 위해 삽니다. 자기 만을 위해 제멋대로 사는 데 목적을 두는 이기주의자, 언제나 우겨 대는 고집불통의 독선주의자, 분수에 맞지 않게 자기 절대화와 우상화에 빠지는 허무맹랑한 인간과 달리, 자유인이 된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그를 위해 삽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삽니다. 우리가 누리게 된 자유는 이 믿음 안에서 참 맛을 냅니다. 자기의 욕심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주님의 뜻을 펼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자기를 넘어섭니다.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주님을 주인으로 섬깁니다.

역설입니다. 우리의 자유함은 자기의 부정이고 거부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주님의 종’으로 삽니다.


<기도>

하나님,
누구도 자기 언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마냥 소리치는 이 오만한 인간의 ‘세상 자유’
그 너머
유익이 되고 덕을 세우는
자유의 사람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충성된 종으로
열성을 다해 나날을 살도록
신령한 은혜 더해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ev
 재난의 징조 (2023년 3월 19일)
편영수 2023/03/12 155
Next
 주께서 보이신 겸손
김지은 2023/03/12 155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