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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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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주께서 보이신 겸손
일시: 2023년 3월 05일
본문: 눅 19 : 29-38
제목: 주께서 보이신 겸손
찬송: 205주 예수 크신 사랑,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349나는 예수 따라가는
교독문: 9(시편15편)

들어가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주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쳐가며 자신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오르는 자라고 분명히 하신 일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들 곁에 서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시는 지 볼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자기에게 하나님이 보이신 바를 선포하는 자(선지자,예언자의 뜻)’ 라고 호칭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7:16)는 얘기를 들으셨습니다. ‘주’로 호칭받는 분의 ‘새끼 나귀를 타심’은 그 자체로 최소한 두 가지의 큰 주제를 안고 있습니다. 거기에 올해 삼일절을 맞이하며 보내는 주일이니 이 시간 시점은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배경으로 설정됩니다. 설교로 주어진 한정된 시간에 세 가지 주제를 다루기는 설교자로서 역부족입니다. 두 가지주제를 좁히는 가운데 말씀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삼일절과 관련해서 펼치지 못한 얘기는 대화시간에 더 얘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 예수님의 왕권과 세상 왕의 왕권
이 단락을 앞부분과 연결하여 이해하기위해 지난번 저의 설교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기대대로 왕으로 즉위하시는 게 아님을 얘기했습니다. 세상 왕처럼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시는 게 아님을 얘기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세상 왕처럼 왕위에 오르는 것과 다르다고 하시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본문에 확실히 왕권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와 예수님의 왕권 사이의 그 간격이 강조됨을 볼 수 있습니다.

2.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2마일정도 떨어진 감람원 오늘 날의 올리브산 쪽의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 계십니다. 마일(mile)은 로마 시대 유래한 거리 단위입니다. 고대 로마군은 행군을 할 때 천 걸음 단위로 말뚝을 박아서 거리를 측정했다고 합니다. 즉 1마일(1mi/h)은 한 시간 동안 간 속도입니다. 1마일을 약1609미터, 1.6킬로미터라고 하면 2마일은 3킬로미터가 넘으니 얼추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리 밖에서 예루살렘의 동정을 듣기도 하고, 이제 그곳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예수님 은 스스로 분명히 하셔야 했습니다.
3. 보내심
예수님은 제자 둘을 시켜 맞은편마을로 보내십니다. 마태복음은 이때 벳바게 마을로 보냈다고 언급합니다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할 것에 대해 이것은 사실이라고 하듯이 구약성서에서 최소 증인의 숫자 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성서가 계속하여 질문 받아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심각하게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이해의 길을 택한다고 해서 가령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은 미리 다 준비시켜놓고 예수님이 가서 하라고 해서 일이 그렇게 된 거 라는 거지요?” 대담하게 인간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둘이라는 숫자도 중요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여행자들이 그렇게 탈 것을 예약하고 준비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서 그걸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주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요?

4. 예수의 주되심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학자들은 이를 두고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요한 왕은 풍부한 포도주와 우유 등을 마음껏 마시기 위하여 포도나무에 자신의 짐승을 매어놓습니다(창49:11-12). 오늘날의 맘껏 향락(?)을 누린 사람이 택시나 혹은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왕은 예수님과는 상당히 극적으로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매여 있는 나귀를 타시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고 십자가 처형을 아시면서도 나귀 새끼를 빌려서 타셔야 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뒤에 각주1을 달아서 돌려보내겠다고(막11:3)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구절을 과감하게 삭제시키고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구절은 왕이 무엇이 필요하면 백성들한테서 징발할 수 있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작용하는 것은 맞지만 이 권세는 사회 속에서 어떤 부류가 사용할 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권세라는 말은 권력과 세력을 아우르는 말입니다(네이버 국어사전). 이 말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피조 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지배력(왕권)을(롬9:21), 사람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이나 상급 권위자나 기관으로부터 위임받은, 허락받은 권위를 뜻합니다(교회용어사전). 예수님이 세상에 사실 때는 “마리”(‘나의 주’를 뜻하는 아람어), “마레”(‘주’를 뜻하는 아람어)로 불렸을 것입니다. 이 칭호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썼고 그리함으로 그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주”(호 퀴리오스, 그리스어)는 하나님의해서 주로 높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 그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것입니다. “주(퀴리오스)”는 죽은 후 신이 된 로마황제에게 사용한 칭호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로마 황제가 아닌 그리스도께 사용함으로 로마황제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요.

예수님의 ‘주되심’이 뜻하는 것은 “많은 신”과 “많은 주”중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고전8:5-6) 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신이 있지만 나/우리를 위하여 세상에서의 생을 사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나/우리 사이의 평화를 이루신/실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 호칭으로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동일반열에 있으면서, 아버지로 칭해지지 않으니 하나님과 구별되고, 예수님의 특별하고 초월적인 속성을 드러냅니다.  

5. 예수님의 주되심 의미
예수님의 주되심 즉 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그의 고통을 자기 안에서 공감하시어 그들을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들이 이방인이요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며 너희 이웃의 이방인과 나그네요 압제받는 자들을 모른척하지 말고 공감하라고 하십니다. 곧 너희의 과거 모습인 것을 모른척하여 압제받는 자들이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긍휼이 여겨서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시어  살 소망이 끊어진 과부의 울음을 닦아주십니다. 그 주님이 미치는 영향은 자신이 주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서 “내가 ‘주’다. 너라는 존재를 잡고 있는 것은 ‘나’이지 여타 네가 가지지 못한 그 어느 것이 아니다” 천명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뒤집어 진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바울과 같이 완전히 뒤집어 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한 순간에 자신의 회개를 이루고 변화를 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문화에서 받아들인 가치관과 틀을 깨야 합니다. 그 낡은 틀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고백할 낡은 틀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좋습니다. 말씀이 아닌 자신이 내면화한 사회의 그 틀을 인간관계에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동풍이 불어서 주께서 가라고 하는 방향으로, 말씀으로 난 길을 걷는 의지적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향은 자신의 가치관, 사는 방식, 특히 다른 사람과 어떻게 지내는가 등 모든 것의 우선이고 모든 것의 중심으로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사는 방식에 매이고 변명하고 바뀌지 않고 사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주님을 만나서 바뀌지 않고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6. 더 없이 겸손한
“주가 쓰시겠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문맥상 제자들의 “선생님” 정도를 의미하며 그의 권세는 선생에 의해서 주어진 말씀을 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겸손하게 드러내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행할 때 “누가 어찌하여 나귀새끼 당나귀를 푸느냐”고 반복되는 말은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씀의 권세가 결정적이어서 마가의 (나귀주인의) “이에 허락하는지라”를 기록할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말을 타기위한 도구로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웁니다. 아직 사람을 태워 마구가 장착되지 않아서 그 겉옷으로 마구를 대신했습니다.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나 왕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사용되지 않은 새것이 그 위엄에 맞기에 그러 합니다.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서 왕의 위엄이 자기에게 덮혀 영향미치기를 구했습니다. 올리브산의 내리막길이 그들의 찬양소리에 묻힙니다. 이는 왕으로 대하는 귀한 대접이었습니다(왕하9:13). 이에 스가랴 선지자의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화평을 전할것이요... ”(9:9-10)예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는 사람들안에서 실현됩니다.

7. 어떤 찬양인가
그러나 여기에서는 종려 나뭇가지를 벤 것이 생략됩니다. 마가의 “많은 사람들은”(11:8), 마태의 “무리의 대다수”(21:8) 탈락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1장)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막11장)라고 찬양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왕조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찬양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의 온 무리가 주님이 행하신 능한 일-사역을 기뻐하고 사역의 열매인 제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왕이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는 예수님이 나신 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 평화로다”(2:14) 그 찬양이 하늘로 메아리쳐 울린 것입니다.

나가며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 땅에서 이루어질 평화에 대해 찬양했습니다. 지금 제자의 온 무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시어 주이시며 진정한 왕으로서 인생들을 건져주시고 구해내시고 그 주린 배를 채우시고 그 갈함 해갈시키시어 그들이 진정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예배하는 자에서 돌이킨 것을 찬양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하늘에서 이루시게 될 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전개되면서 평화는 하늘과 땅에 임했고, 임할 것입니다. 평화를 가져올 왕의 도래는 하나님께 영원히 찬송할 주제입니다. 그 왕은 참으로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걸으시매 나귀새끼를 타고 멈춤없이 그 뜻을 함께하는 자들과 걷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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