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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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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그 한사람, 잃어버린 자
일시: 2023년 2월 19일
본문: 눅 19 : 11-28
제목: 그 한사람, 잃어버린 자
찬송: 205주 예수 크신 사랑, 497주 예수 넓은 사랑, 349나는 예수 따라가는
교독문: 4(시편5편)


비유에 들어가며
므나비유는 달란트비유만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므나비유를 읽으면서 익숙한 달란트 비유처럼 듣습니다. 오늘 우리는 달란트 비유를 거의 떠올리지 않고 누가복음의 므나비유로 예수님이 어느 시점에서 이 이야기를 왜 하셨는지 새겨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 유대 땅, 1세기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예수살렘에서 17 마일 떨어져 있는 여리고이고, 예수님이 사시던 주후30년 즈음, 1세기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하셨고(18:31), 므나비유를 하셨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19:28). 그야말로 길 위에서 나눈 이야기의 한토막입니다.

아켈라오
이 이야기는 달란트비유와 달리 왕의 이야기(12, 15, 27절)가 나옵니다. 신약시대에 헤롯대왕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유대민족을 강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가 죽자, 헤롯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아들 아켈라오도 로마로 가서 황제의 명으로 왕으로 임명받고자 했습니다. 아켈라오는 어느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약 삼천명의 유대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유대교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가만있지 않고 로마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잔혹성과 경제적 억압을 알려서 왕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아켈라오는 결코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분봉왕으로 불리우는, 성주, 행정장관 정도의 지위를 받아서 돌아와 계속해서 폭정으로 다스렸고, 후에는 로마에 의해 빌라도 총독으로 교체됩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켈라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오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이르신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셨습니다(11절). 예루살렘성이 수도이며,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몇 백 년 만에 마카비전쟁(주전168-164)으로 잠시 독립을 맛 본 이들에게 예수님은 마카비전쟁의 시대를 재현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압제받는 때에 회개를 외치며, 광야에서 시험받고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을하셨지요. 이는 마카비 때에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광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전세는 약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게 보인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마카비처럼 한다면 기꺼이 왕으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오르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열광적인 추종자를 앞세워 예루살렘을 접수하여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 왕의 즉위식 이었습니다.

므나비유
그러나 예수님은 므나 비유를 통하여 헤롯왕처럼 등극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히려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가듯이 잠시 먼 나라로 가는 통상의 모습을 따라 예수님 역시 잠시 이곳에 없을 것이며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이 헤롯왕처럼 무력을 사용하여 왕위에 오르시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어떤 귀인, 주인이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그러니까 한 사람한테 한 므나씩 줬습니다. 똑같은 재화가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게 쓰인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종이라고 했지만 재량대로 쓸 수 있는 므나가 맡겨진 것은 그들이 노예의 신분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가 있는 동안 장사하라 듣고, 이후에 주인이 알고자 하여 불러서 종들은 자신의 일을 고합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이가 있었고, 다섯 므나를 남긴 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종’ 이라고 칭해졌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trustworthy, faithful)하였으니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라” 고 칭찬(공동번역)받았습니다. 각각 열배와 다섯 배를 남겼으니 그 성과만(?)을 보고 칭찬한 것처럼 한절(17절, 19절)씩만을 배당합니다.

달란트비유를 보고 자본주의의 기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시대의 경제관념은 자본주의가 정착된 지금의 시대와는 다릅니다. 당시는 농경사회였습니다. 재화가 한정되어 있고, 공동체 내의 누군가의 몫이 많아지면 누군가는 부족하게 될 것이기에 탐욕, 부정직, 불공평은 큰 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재화를 가진 사람이 많이 소유하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의 윤리에 맡겨두고, 법으로 감시할 뿐입니다.

10배나 5배의 이윤은 그 시대가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돈을 가지고 이자놀음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고리 대금업은 비난 받아 마땅한 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고 했습니다(눅6:35) 기독교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종교개혁가 칼빈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이자는 도시자본주의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정당하다고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경제체제에서 이자 놀이하는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막스 베버는 칼빈의 사상이 자본주의를 부흥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로고스커뮤니티 자료 재인용).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도 고리대금업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다른 사람의 집과 재산을 빼앗고, 채무자와 그 가족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열 배와 다섯 배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남기기 위해 이렇게 악랄한 일을 하였는지는 성경에 없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남긴 대로 보상을 주었지만 칭찬은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수세기를 거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종들에게 맡기신 일을 성경에서 찾자면 능력과 권위를 주시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신 12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70여 제자들을 두 명씩 보내면서 주의 말을 전하라고 맡기셨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지극히 작은 기회’에 충성하여 ‘착한 종’으로 칭해지며 예수님의 통치의 때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이제야 한 므나 그대로 간직한 이
이 비유의 전개상 한 므나를 받고서 그대로 받아둔 사람에게 비중이 갑니다. 그는 한 므나를 천에 싸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땅에 묻는 것은 당시의 흔한 재물 보관법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엄하다고, 지독한 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이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를 잡고 인터뷰라도 해보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주인이 그에게 한 므나를 주었습니다. 한 므나는 100데나리온으로, 100일간의 품삯으로 보는 계산법에서는 500만원이 될 수도 있고, 1000만원도 될 수 있습니다. 이 돈을 주인이 맡겼는데도 그는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주인은 맡겨서 자신의 것으로 장사할 수 있게 했는데 종은 맡기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변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판단오류일 수 있으나,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니 맘 놓고 장사할 수 없는 마음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사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나중에 찾아간다고 하시니 농경사회의 계산법에 따라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는 것이라고 주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종은 다른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주고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 므나씩 받은 사람 중에 자신만 주인에게 재물을 땅에 묻어두는 반응을 했는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행동이 내 것이 되지 않을 자산을 맡겨놓고, 그러나 그에 대해 손해를 본다면 자신이 손실을 배상해야하는 듯이 보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과 달리 왜 활기 있는 모습인지 눈여겨보기보다는 좋지 않게 보거나,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시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나누지도 배우지도 않았고 어쩌면 고립(?)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로부터 배울 게 없다하고, 나는 최고, 최선의 방법으로 잘하고 있다 여기는 겸손함이 전혀 없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방패처럼 굳건히 붙들고 살고 있고,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자신을 낮게 보는 겸손한 사람들은 매우 소수이기 때문이지요.  

그가 여러 가지 일을 관리하고 있어서, 또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주인이 시킨 일을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자신의 것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시장을 나가서 장사를 하기보다는 뒷짐진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구경꾼이었습니다. 도매시장으로 넘겨서 경매받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물건을 생산하는 일도 하지 않고, 노동으로 자신을 훈련시키지도 않았고, 일의 즐거움을 몰랐습니다. 시장이 활기찬 기운을 띄며 개시할 때 상인들 각자 암묵적으로 잡는 시세가 있습니다. 장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그 날 시장에 그 물건이 많이 나왔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여러 군데 판매처를 돌면서 어느 물건을 얼마에 살지 판단하는 고객들의 얼굴에서 자신이 상정한 시세가 주효한지 살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일을 벌이고 괜한 손해는 입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주인에게 넘겼습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맡긴 일에 압박감을 느끼고, 해야한다는 압박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실행하기보다는 압박을 피하는 쪽으로 가버립니다. 그에게 기회는 사라지고, 당시의 회자되는 “있는 자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주인은 그가 최소한 은행에 맡기는 수고를 하여 장사를 한 거보다는 적은 이익을 남긴다하더라도 그의 노력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고 자신의 종됨을 지키지 않은 그는 "악한 종"이라고 칭해집니다.  그는 주인이 맡긴 것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으로 반응하지 않은 사람으로 우리는 이 종을 인식하게 됩니다.


잃은 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때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선포한 다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종에게 얘기를 더 걸어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하는 잃은 자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잃은 자였던 우리가 주님께 찾은 바 되어, 그 잃은 자의 손을 잡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일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무리들에게 어느 왕의 이야기로 들리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는 자가 가야할 길을 얘기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오르시면서도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의 길을 따라 주님이 만나주신 나를, 이웃들을 만나는
저희가 되게 성령으로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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