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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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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순

제목


율법의 행위와 구별되는 '믿음'- 갈라디아서 7
찬송:341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342 어려운 일 당할 때, 348. 나의 생명 드리니
교독문: 51. 히브리서 11장
본문 : 하박국 2:4, 갈라디아서 3:1-11

1.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자는 주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일조차 쉽지는 않습니다. 읽을 때마다 같은 구절이 또다른 말씀으로도 읽힙니다. 그러니 말씀을 읽는 제 눈과 귀가 제대로 열리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여러 방법도 동원해 봅니다. 참고자료도 찾아보고 주석도 찾아보고 원문도 찾아봅니다. 성경 역본도 비교해봅니다. 그리고는 갈라디아서에서 간절히 믿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의 마음도 상상해 봅니다. 편지를 받아 함께 읽고 듣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도 상상해 봅니다. 이천 년 전 기독교가 형성될 무렵에, 헬라어를 쓰던 소아시아 갈라디아 사람과는 아주 다른 시대에, 아주 다른 문화 환경에서, 다른 말과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저와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기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전한다는 게 제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너무도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앙을 함께 키워가는 곳이니 설교자도 부족함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함께 읽으며 하나님 말씀을 꺼내놓습니다. 교우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 내 눈을 본 구절과 내 귀로 들은 말씀 너머의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청해봅니다. 그러다보니 루터가 갈라디아서 주석서에 쓴 다음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마귀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라고 수없이 맹세하게 만들 정도로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명확하게 거짓말을 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시험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 세속적이고 안일한 사람들은 한두 번 정도 선포된 복음을 듣고, 곧바로 자기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똑같이 넘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며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된 종교의 교리를 고수하고 옹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클지라도 어떤 공격이나 싸움에서도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을 쉽게 꾀고 그들을 절망 속에 집어 넣는다. 우리는 "나는 완벽하다. 그러니 절대로 넘어질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항상 자신을 낮춰야 한다. 오늘 서 있다고 해도 내일은 넘어질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바울이 쓴 편지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가 루터의 해석으로 더 유명해진 글이라서 루터의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읽다보니 저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큰 참고가 되었습니다. 두렵고 겸손한 마음. 그것을 잣대로 돌아보자면 결코 자유롭지 않았으니까요.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가?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귀를 열고 있는가? 계속해서 내 생각이 아니라 주 예수 말씀을 찾고 있는가? 그렇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찔리니까요.  

예람에서는 기독교 고전을 기회가 되면 함께 읽어왔습니다. 유명한 구절과 간단한 명제만으로 루터의 성경 해석을 쉽게 이해하고 넘기지 않고 직접 그의 글을 읽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도 3년 전 출간이 되어서 최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을 수록 알게 됩니다. 명언처럼 간단하게 전해진 루터의 명제만으로 루터의 성경 해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의 주장이 성경 같은 진리라고 여겨 그의 글을 인용하고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개신교도로서 종교개혁가 루터의 영향 아래 있음을 의식한다면 그의 주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개신교도로 성실히 풀어가야할 과제일 것이라 부족한 이해력으로나마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어보니 실감합니다. 엉뚱한 이해로 빠지기 않기 위해 직접 차분히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성경 읽기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2. 율법의 행위와 구별되는 믿음

3장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초해야 함을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계속해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새 사람으로 변화하는 기적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입니다. 성령은 또 믿음을 통해 받은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왔나요? 믿음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3:2)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듣고 믿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믿음에 대한 메시지로부터', 혹은 '믿음을 들음으로부터', 혹은 '들은 바를 믿음으로부터', 혹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메시지'. 혹은 '믿음을 일으킨 메시지'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듣고 믿어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온 성령이 아바 아버지라는 고백을 가능하게 합니다. 갈라디아인들의 이 경험은 할례와 같은 율법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이라 말하는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영이라 합니다. 그 영을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도 있고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인간 안에 내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성령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율법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이를 해설하기를 율법의 행위가 무익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율법을 따르는 것과 믿음 없이 율법을 따르는 것을 구분해서 풀이합니다. 그는 비유를 듭니다. 나무(그리스도를 믿음)가 있고 열매(율법의 행위)를 맺는 것인데 나무도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요. 믿음과 성령을 통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선행이 이루어지는 것이 참신앙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교사들에 홀려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을 뒷전으로 밀어내며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눈 앞에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말이지요. 회심한 바울은 그 어느 편지에서보다도 강경하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어조가 강해집니다. "아, 생각 없는 갈라티아 사람들!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여러분 눈앞에 옛 그리스도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생생히 나타나 계시는데도요."

1절이 형제여 자매여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없는 갈라디아 사람들!라며 답답함으로 시작합니다.  원어를 바탕으로 조금 더 풀이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타나셨는데 사악한 주술사에게 마법에 걸릴 만큼 어리석다니! 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 우리말로 '꾀다', '홀리다'로 번역된 말은 '사악한 눈으로 마법을 걸다'는 뜻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사악한 주술 따위에 걸려들다니,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킨 거짓교사들을 사악한 주술사 정도의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초등학문과 그리스도 복음을 구별하는 바울은 당대 유행하던 주술과 차원이 다른 그리스도 복음의 시각으로 거짓교사들을 자리매김합니다.

마법과 저주는 당시 갈라디아인들에게 익숙한 당대의 문화행태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규정으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통할 것 같은 당시 갈라디아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설득방법입니다. 앞서 루터가 말한 바 있지만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것을 촉구하는 셈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니, 걸려드는 사안은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 역시도 생각없는 사람들이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만한 삶을 살곤 합니다. 우리 앞에 이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을 주라고 믿어, 말씀을 구하며 돌이키지도 않은 채 사악한 마법만큼이나 엉뚱한 데 한눈 팔곤 합니다. 우리 눈 앞에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타나셨다면, 그를 우리가 보고 있다면, 이렇게 두려움도 없이, 이렇게 심각함도 없이, 절실히 구함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상 무엇을 기대고 무엇을 믿고 살고 있는 것인가요? 찔리는 바가 많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어제 핵없는세상 시민모임에서 툰베리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툰베리가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집에 불이 났다면 가만 있겠냐고요. 하나님이 세우신 대자연의 창조질서가 뒤흔들리고 있는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불이 난 집에 불을 끄듯 창조질서를 구하는 데 발 벗고 나서는 게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다른 것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갈라디아 교인들보다 더 심각하고 사악한 마법에 우리 스스로 걸려들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들의 시대에는 적어도 우리처럼 생태계 자체를 교란시키지는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그들보다 더 생각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도 세상에 있는 우리 내부에는 죄와 부패의 찌꺼기가 있으므로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회개하며 믿음에서 비롯된 성령의 도움으로 새 사람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고 믿음에서 비롯된 성령을 통한 변화입니다. 한 번 성령을 받은 것으로 완전히 깨끗해진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가볍게 살아가듯 할 수는 없습니다.

하바국은 바벨론의 횡포에 침묵하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2:4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하나님의 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니 그 믿음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히브리어 마소라 성경 번역본과 바울이 읽던 칠십인경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된 칠십인경에서는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함(믿음)으로 살리라'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라는 표현을 하박국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만 칠십인경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박국의 구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세계에 눈뜨고 그것을 부각시킨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강조하지만 우리는 막연하고 상투적으로 믿음을 강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믿음의 실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제각각 주관적으로 이해하거나 공허하게 간주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낯설게 읽고 함께 읽을 필요가 절실합니다. 다 안다고 여기며 그냥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도 하나님이 중재자를 통해 인간에게 주신 것이지만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율법은 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변화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의와 구원의 기초가 되고 출발이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그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바울은 그가 하나님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매개로 갈라디아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인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차원이 낮은 주술사 못지 않은 거짓교사들에게 빠져들어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도, 바울과의 교우 관계도 금이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중심에 놓고 형성된 믿음의 관계이지만 그것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갈라디아인들의 행보는 결정이 나겠지요. 갈라디아인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편지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심을 저희가 알고 있음에도 저희는 잊고 삽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심을 듣고 있음에도 저희는 외면하고 삽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빈약해서 성령도 잊고 엉뚱한 데 눈을 돌린 채
제 욕심에 방황하곤 합니다.
집에 불이 나듯
지구 생태계가 위태롭고
모든 생명이 위태로운데 무감각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 새 사람 되게 하소서.
새 세상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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