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알립니다
  [예람을 세운 뜻] 작은 등불로, 한 줌의 소금으로[2021/01/20]  

작은 등불로, 한 줌의 소금으로

예람교회 한 돌을 맞으며(2002년)


박영신(공동목회)

<첫 걸음>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소집단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가 하나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람교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우리 교회가 특별할 것도 새삼스런 것도 없는 셈이다. 다른 소집단 공동체 교회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들이 한다고 뒤따라 하고 남들이 간다고 뒤따라가고자 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의 교회와 교회의 모습에 의심을 품었고 오늘의 교회를 휘몰아 가는 강풍에 맞서려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지난 해 11월 4일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 참 교회란 어떤 것이겠는지 다시 알아보고자 하였다. 우선 성경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목회하다 영구 귀국한 황두용 목사가 성경 공부를 맡아 진행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을 나누었다. 주일마다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여덟 차례나 이어졌다. 벌써부터 나눔의 공동체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참 교회를 찾아 함께 길 떠난 길벗들이었다.

초대 교회가 모형이었다. 잃어버린 초대 교회를 되찾고 잃어버린 공동체 교회를 되찾고자 하였다. 신학 서적이나 신학자의 생각을 빌리어 올 것이 없었다. 신학의 전통보다 신앙의 전통이 값지다는 생각이었다. 신학의 교리와 논쟁에 사로잡히려 하지 않았다. 신학의 체계에 익숙한 이들이 다스리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에 터한 신앙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마땅히 평신도들이 다스리는 공동체였다. 신학의 지배로부터 성경의 지배로 돌파해 가고자 하는 뜻이었다.

둘레를 한두 번 살펴 본 것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공동체 교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교회가 아니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이라는 목회 철학(?)을 투철하게 믿고 따르는 내일의 대형 교회였다.

이것은 아주 단단한 철학이다.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며 이루어 내고 말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거대한 교회와 어깨를 나란히 할 때까지 어떤 어려운 고비도 견뎌 내겠다는 열정도 넘쳐 났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일 뿐 교회의 참모습이나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참 교회는 그러한 철학을 거부해야 했다. 참 교회는 성경에 터한 믿음의 공동체로 이 땅에 서 있는 것, 그것으로 넉넉하고 넉넉할 수밖에 없는 믿음을 지킬 따름이었다.

교회 이름은 예람교회로 정하였다. 여러 이름이 올라 왔다. 겨자씨 교회, 낮은 교회, 모두 교회, 새터 교회, 섬기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 양재 교회, 연합 교회, 자유 교회, 작은 교회, 그리고 예람 교회였다. 함께 모인 15명이 마지막 남은 '작은 교회'와 '예람 교회'를 두고 투표하였다. 한 표 차로 '예수 사람'의 뜻을 줄인 '예람'교회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2월 25일 예람교회가 문을 열었다. 그날 오후 3시 양재역에 있는 대한성서공회 4층에서였다.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에 따라 마련한 예람교회의 모임터이자 예비되어 있던 예배의 처소였다. 거기서 첫 예배,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와 예람교회의 설립 예배를 함께 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감사한다.

<'예수의 사람'으로>

예람교회의 바탕이 되는 뜻도 마련해 두었다. 모두 뜻을 나누어 합의한 문서였다. 우리 교회의 선언과 고백이다. 첫 예배 때 함께 읽은 '예람교회를 세우며'가 그것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수 오심의 날을 맞아 200I년 12월 25일 대한성서공회 건물에서 몇몇 사람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터한 예람(예수사람)교회를 세운다.

첫째, 말씀의 교회가 된다.
물량과 성장주의에 휩싸인 세속의 흐름을 거부하고 복음과 은혜를 믿는 예수의 사람이고자 한다.

둘째, 본래의 교회로 선다.
권위주의와 교파에 얽매인 교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예수의 사람이고자 한다.

셋째, 생명의 교회로 나간다.
기복주의와 탐욕에 빠진 인간 중심의 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일하는 예수의 사람이고자 한다.

앞머리에 밝힌 것은 예람교회의 역사 전통을 밝히고자 함이다. 아무렇게나 세워진 것도 아니려니와 그럴 수도 없는 교회의 역사성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넓은 이해의 틀 안에 놓여 있다.

'말씀의 교회가 된다'고 한 첫 번째 선언은 우리 모두를 마구 휘어잡아 몰아가고 있는 오늘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말씀으로 돌아가 세찬 물결에 밀려 뒷전으로 내몰린 복음과 은혜를 다시 확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난 한두 세기 동안 물량 위주의 삶의 방식과 성장 위주의 사회관이 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더니만, 드디어 그 물결은 이 땅에도 몰아닥쳐 우리의 의식과 삶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물질의 잣대로 재어보고 그것을 성공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물량의 크고 작음이 곧 삶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물량 위주의 성장이 모든 것의 위에 자리하는 절대 군림의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우상이었다. 이 우상이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강단으로 올라가고 성도의 의식과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야 만 것이다. 물량 위주의 성장주의가 교회를 식민화하고 교인의 삶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복음과 은혜를 잃어버린 껍데기 교회로 떨어진 것이다. 예람교회는 이러한 교회 안팎의 흐름에 맞서고자 한다. 말씀의 교회가 되어 복음과 은혜의 세계를 믿고 지키고자 한다.

'본래의 교회로 선다'고 한 두 번째 선언은 숨쉴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꼭 막힌 오늘의 교회를 더 이상 두둔하지 않을뿐더러, 그 까닭이 인간이 만들고 각색한 권위의 탈과 그 탈을 못 벗어버리는 교권주의와 교파주의에 있다고 보고, 이 모든 것을 돌파하여 성경에 담긴 예수의 가르침과 삶으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처럼 폐쇄성을 강조하고 그 닫힌 공간 안에서 아성을 높이 세우고 있는 조직도 없다. 교권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높은 담벼락에 갇힌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새기고 되새기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이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생각하는 만남의 기회를 허락지 않는다. 교파주의에 묶인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믿음의 공동체에 문을 닫고 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 서로 귀기울이며 서로 배우는 겸손을 거부하여 예수의 사람으로 함께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예람교회는 이러한 독선의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의 신앙 고백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함께 배우고 익히고자 한다.

'생명의 교회로 나간다'고 한 세 번째 선언은 인간 중심의 세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하나님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교회의 참 뜻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욕심과 동기로 틀 지워져 왔다. 인간의 타락이요 한계이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지러져 있는 것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그 무엇이든 모자란 것이다. 인간의 의식 세계와 제도와 체제 그 모든 것이 다 완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밑뿌리로부터 탐욕으로 얼룩져 있기에 아무리 선행을 꿈꾼다 하더라도 그것은 출발부터 악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움이란 것의 그럴듯한 포장 안에 도사린 음흉한 인간의 한계, 그 너머 높은 데서부터 우리에게 비추는 생명의 빛을 마음에 받아 그 빛이 비추는 길 따라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며 그것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이 생명 있는 교회이다. 좁다란 이기성을 부추기고 있는 인간 중심의 '죽은' 교회를 허물고 하늘의 뜻 따라 모두가 지체가 되어 서로 돌보는 '산' 교회, 그것이 참 교회이다. 인간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껏 일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사람의 참모습이다.

<한 뿌리, 가지와 잎으로>

'예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예람교회는 어느 한두 사람이 주도하지 않는다. 목사 중심이 아니다. 장로 중심도 아니다. 평신도 중심이다. 평신도도 목사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목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라로서 평신도와 구별된다는 생각은 종교개혁 이전의 생각이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세상에서 각각 맡은 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한 한에서 모두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이다. 애초부터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차등도 지울 수 없었다. 설교로 봉사하는 것은 값지고 다른 일로 봉사하는 일은 값지지 않다는 상하구별의 생각은 교회의 참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받은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다 값있는 일이다.

예람교회에서 봉사하는 목사는 보수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친 '사도 가운데 사도'라 할 수 있는 바울 사도가 보수를 받지 않은 것처럼.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바친다면 그것은 반드시 예람교회에 한정 지울 것도 아니었다. 연보는 교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유지비용을 남긴 다음 모두 도움이 필요한 바깥 사람에게 보내도록 하고 또 선한 일을 하는 바깥 사람에게 보내어 동참의 뜻을 나누어 갖도록 하였다.

예람교회는 출발부터 공동 목회이다.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말씀의 뜻을 조금은 더 올바르게 헤아리고, 그 넓고 깊은 뜻을 그르치지 않고 조금은 더 온전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동 목회자의 교파 배경도 물론 달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하게 이해하여 더욱 온전한 데 이르고자 함이었다. 다양성은 대립과 혼돈과 상대성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인정하며 서로 생각을 보태고 도우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에 이르게 되는 수단이며 장치인 것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예배가 끝난 다음 '설교'를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눈다. 그것이 한 시간 가까이, 때로는 한 시간 넘게 이어진다. 설교자가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여 서로 다른 언어로 선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내기에는 진리에 대한 우리 모두의 목마름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와 생각의 나눔이 결코 완전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 주일에, 그리고 다음 주일에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우리 모두가 말씀을 향하여 함께 자라는 성도일진대 이야기는 끝낼 수 없고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증표이며 공동체의 끈이다. 주보에는 <지난주 설교> 난과 <지난주 설교와 '나'>라는 난이 나란히 함께 실린다. 이미 했던 설교를 줄여 써놓은 <지난주 설교> 난의 요약 문보다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쓰는 <지난주 설교와 '나'>에 실린 평신도의 글이 언제나 더욱 인상 깊고 더욱 유식하기도 하고 아니 더욱 알차다는 안팎의 평이 나올 정도다. 무엇보다 설교 내용을 흘려 버리지 않고 새김질 한 것을 글로 적어 내는 것, 예람교회의 돋보이는 점이다.
몇몇 아는 분들 사이에는 예람교회를 두고 '과연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교회가 가능한 것인가?'고 정색을 하며 묻는 경우가 있다. 한 교단의 목사(들이)가 자그마한 공동체 교회를 목회하는 경우는 있지만 교단이 다른 목사들이 함께 공동 목회의 틀을 만들어 공동체 교회를 받드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대화'와 '토론'의 교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교회는 예배의 자리이지 대화의 마당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아니 대화는 한다 손치더라도 토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익히고자 하는 뜻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따로 없고, 여자와 남자도 차등 받지 않으며, 학식의 적고 많음이 아무 상관이 없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칸막이 없이 서로 사귀고 서로 나누었으며 서로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다. 교회의 참 모습이었다. 설교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교회 안에서 토론을 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위계 질서와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단숨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전래하는 우리의 전통과 삶의 방식 속에 깊이 밴 유교의 묵은 찌끼에서 온 것이다. 문제는 우리 나라의 문화 속에, 우리 사회의 구조 속에 권위와 위계가 상하로 새겨져 있어 서로 터놓고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마당을 아예 없애 버렸다는 데 있다. 예람교회는 대화와 토론을 가로막는 온갖 인습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귐을 일궈 가는 공동체이고자 한다.

이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마음을 요청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는 참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 사람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은 간단치 않다. 대화를 잃어버린 가정, 토론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학교 교육, 어떤 다른 소리도 짓눌러 버리는 교회의 구조가 참 공동체의 가능성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예람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부러워한다는 어떤 분의 말도 바로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무거운 전통과 구조의 공고함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람교회에는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없다. 예배 위원회와 운영 위원회만 있다. 어떻게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 하면서 일을 '결정'해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 배워야 할 몫이다. 그 동안 뒤틀린 삶을 바로잡을 때까지는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기적도 있고 은혜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에 맡겨 둘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도한다.

<한 돌 맞으며>

예람교회가 한 돌을 맞는다. 어느 쪽을 보아도 예람교회는 단색의 공동체가 아니다. 뿌리는 같으나 각각 다른 나뭇가지에 꼴과 크기를 달리하는 잎사귀로 서로 기대며 어우러지고, 서로 다르면서도 한 뿌리에 이어져 하나인 것을 확인하고 서로 안아 주는 그러한 공동체이다. 예람교회가 한 돌을 맞으면서 그러한 '수용의 능력'을 키워 왔는지 모두들 물어볼 일이다.

예람교회는 평안하다는 이유로 어느 한 곳에 닻을 내려 머물러 있고자 하지 않는다. 암초도 만나고 풍파도 겪을 것이다. 물 속의 바위를 살펴야 하기에 조금은 둘러서 가야 하고 바람과 물결 때문에 잠시 휘청거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떠난 곳으로 뱃길을 돌릴 수는 없다. 참 교회란 잔잔한 바다에 한가롭게 떠 있는 돛단배일 수는 없다. 암초를 만나 배가 깨질 듯 파선의 위험도 겪고 질풍노도에 뒤집힐 듯 함몰의 위기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예람교회는 저 영원한 진리의 포구를 향해 배 저어 갈 것이다.

예람교회는 새로운 교회 상을 '드러내고자'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각각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뿐이다. 대형 교회는 대형 교회대로 중형 교회는 중형 교회대로, 그리고 예람교회처럼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그 뜻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하나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어느 하나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독선이다. 예람교회는 예람교회이고자 한다. 모든 것에 침투하고 있는 오늘의 문명과 어제의 전통에 맞서 참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람교회는 예람교회이고자 한다. 작은 등불로, 한 줌의 소금으로, 겸손하게!

  [2021/01/20] [예람을 세운 뜻] 작은 등불로, 한 줌의 소금으로 

 설교말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십자가 수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 (2021년 10월 10일) 
우리의 믿음, 어떠한가? 

 설교와 나

10월 10일 설교와 나 
2021년 10월 3일 설교와 나 
10월 3일 
21년 8월 22일 설교와 나 

 성경공부

10월 17일 주일학교 
10월 10일 주일학교 
10월 3일 주일학교 

 자유게시판

사경회 
10/24 오후 3시 예람 온라인 예배 안내 
[예람사경회2021] “믿음이냐 행함이냐?”라는 쟁점... 

 나눔과 모임

9월 26일 [4]
9월 19일 
[re] 치유 [2]

 사귐과 대화

10월 3일 
[re] 문제될 건 없습니다 
9월 26일 

2001년 11월 ~ 2002년 12월까지 설교말씀